[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주방의 뼈와 살, 팬과 기름

2016/04/19

주방에서 가장 흔한 부상은 자상(刺傷)이다. 칼로 베이고 찔려서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난다. 그 다음은 화상(火傷)이다. 주방은 모든 것이 뜨겁다. 오븐 속 불길은 꺼질 일이 없다. 모든 주방 기기는 잠재적으로 뜨거운 상태다. 방심한 나머지 맨손으로 무언가를 잡는다면 그날 손바닥은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래서 늘 타올을 겉대어 물건을 잡는다. 필수적인 습관이다. 그러나 뜨거운 기름은 언제든 튈 준비를 하고 있다. 타올을 겉대어도 기름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주방 어디에나 있는 이 기름은 주방의 살이다. 그리고 모든 주방인은 잠재적 염좌(捻挫)환자다. 주방은 모든 것이 뜨겁다, 라는 말을 이쯤에서 수정해야 한다. 주방의 모든 물건은 뜨겁고 무겁다. 믹서에는 마력(馬力) 단위로 표시되는 출력의 모터가 달려있고 밀가루와 설탕 포대는 기본이 20kg이다. 무엇보다 주방의 뼈와 같은 팬이 무겁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방의 뼈와 살, 팬과 기름이다.

팬. 그 무거움에 대하여

“윽.”

처음 주방에서 팬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한국 남자는 군대 다녀온다며 으시대던 나는 없었다. 멋을 부리며 팬 몇 개를 한 손으로 들어올렸을 때 손목이 묘한 각도로 꺾였다. 그만큼 팬은 무겁다. 정확히 말하면 주방의 팬은 무겁다. 주방에서 어머니들이 쓰는 가벼운 코팅 팬은 볼 수가 없다. 왜일까?

팬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 많은 열을 품을 수 있다. 말인즉슨 팬이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팬이 무거울수록 팬 밑바닥이 두껍다. 그 말은 또 무엇인가 하니 팬 밑바닥이 골고루 데워진다는 것이다. 싼 팬은 보통 얇고 가벼운데 이런 경우 팬은 쉽게 식는다. 화기의 열기가 얇은 밑바닥을 뚫고 직접적으로 음식에 닿기 때문에 두꺼운 팬보다 음식이 타기가 쉽다. 두꺼운 팬은 뜨거워지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뜨거워지면 잘 식지 않는다. 화기의 열기도 직접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팬 전체를 달구어 간접적으로 음식에 닿기 때문에 음식이 쉽게 타지 않는다. 물론 가벼운 팬, 얇은 팬이 필요할 때가 있다. 팬이 얇을수록 빨리 달구어진다. 급히 요리를 해야 할 때 용이하다는 뜻이다. 더불어 팬이 얇기 때문에 열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이점을 살린 팬이 바로 중화냄비인 웍(wok)이다. 웍의 밑바닥 두께는 3mm가 채 안 된다. 이 얇은 두께 아래 섭씨 1000도 가까이 되는 프로판 가스불을 쏴주고 웍을 돌리면 우리가 열광하는 ‘불맛’이 난다. 그러나 가정에서 중국집에서 맛보는 불맛을 내기 쉽지 않다. 팬이 얇더라도 화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재료를 넣으면 온도가 쉽게 떨어진다. 팬 위 온도가 100도 언저리로 떨어질 때 재료는 볶아지는 게 아니라 자체 수분으로 삶아진다. 해결책은 역시 두껍고 무거운 팬을 쓰는 것이다. 무쇠팬처럼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팬을 10분 넘게 뜨거운 불에 달구어 요리를 하면 맛이 아예 다르다. 팬의 무게 말고도 열전도율 이야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까지 따지기에 인생에 신경 쓸 것이 한 둘인가? 점심 메뉴 고르는 것도 스트레스가 되는 시대. 간단하게 생각하자. 무거운가? 가벼운가? 슬프게도 가벼우면서 열을 많이 품는 팬은 없다. 영국 저널리스트 비 윌슨이 ‘포크를 생각하다’에서 옮겼듯 “불가능이 없는 이 좋은 세상에도 완벽한 냄비용 금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팬에도 전략적 포트폴리오 구성이 필요하다. 만능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벼운 팬과 무거운 팬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무거운 팬이 더 좋다.

그렇다면 왜 팬이 쉽게 식는 것은 좋지 않은가? 볶음이나 튀김을 할 때 재료가 갈색이 되도록 구워야 맛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색은 맛의 단서다. 단백질 조직이 120도가 넘는 열을 받으면 단백질은 갈색으로 변한다. 이것이 마이야르(Maillard)현상이다. 이 마이야르 현상은 아미노산과 열의 화학반응이고 그 결과물은 우리 인류가 좋아하는 풍미다. 그럼 왜 그 구운 맛에 끌릴까?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 리처드 랭엄은 『요리 본능』에서 인류는 화식(火食)을 통해 음식 섭취 속도와 양이 패러다임 전환적으로 늘고 그 초과된 영양 공급으로 두뇌가 진화했다고 밝힌다. 어찌되었든 이 갈색은 이미 밝힌 것처럼 섭씨 1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발생한다. 만약 온도가 낮게 되면 재료에 있는 물기가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끓는다. 팬이 가벼우면 보통 그렇다. 그래서 나는 팬을 고를 때 직접 들어보고 고른다. 한 손으로 들기 힘들면 오케이. 온라인으로 고를 때면 상품평을 본다. ‘너무 무거워서 쓰기 힘들어요’라는 평이 있으면 딱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는 이유

기름을 치면 맛있다. 대부분의 맛과 향 분자가 수용성이 아닌 지용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팬에 기름을 두르는 이유는 맛을 더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역시 온도와 관계가 있다. 기름은 팬 위의 재료와 팬 사이에 온도 전달자 역할을 한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달걀 후라이를 해보면 달걀이 팬에 달라붙고 쉽게 탄다. 왜냐하면 팬의 뜨거운 열이 매개체 없이 바로 달걀에 닿아서 그렇다. 기름은 재료 전체에 골고루 온도가 적용되도록 돕고 팬이 가진 열의 완충 작용을 하여 타는 것을 막는다(물론 너무 뜨거워지면 재료는 탄다). 더불어 버터와 같은 기름은 풍미를 더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름을 써야할까?

올리브유는 일반적으로 가열 조리에 쓰지 않는다. 이유는 올리브유의 성분이 열에 약해서다. 세계의 모든 요리사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물어보는 과학적 조리의 아버지, 화학자 해롤드 맥기에 따르면 올리브유를 일정 온도 이상 가열하면 본연의 향이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에 굳이 가열 조리시에 좋은 올리비유를 쓸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더불어 개성이 강해 마구잡이로 쓰게 되면 맛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 과유불급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리브유는 비싸다. 굳이 그 비싼 올리브유를 별 효용 없이 쓸 필요는 없다. 대신 좋은 올리브 오일은 음식의 마무리에 혹은 드레싱으로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올리브유는 발화점이 낮에 가열 조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완벽히 맞는 말은 아니다. 올리브유도 품질에 따라 발화점이 다르다. 품질이 좋은 올리브유는 발화점이 섭씨 22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래서…

주방은 땀과 기름이 현현(顯現)하는 실존의 공간이자, 냉정한 숫자와 물리가 함께 하는 과학의 장이기도 하다. 오늘 당신이 한 요리가 맛이 없는 이유는 소질이 없어서도 아니고 날이 이상해서도 아니다. 충분히 무거운 팬을 쓰지 않았고 충분한 양의 기름을 두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의 팔 근육이 견딜 수 있는 질량이 일정 수준 이하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몸과 머리, 뜨겁고 차가운 것이 함께 하는 이 주방의 이야기가 늘 흥미롭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요리는 그 맛으로 화답한다. 팬과 기름, 이 두 가지는 그 이야기는 충분히 귀 기울일만 하다. 혹시 아는가? 당신이 무거운 팬을 들어올려 만든 요리에서 프로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