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2편)

2018/03/30

 

500년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위로 고개를 내민 작지만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산. 한양의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입니다. 해발고도가 342m에 불과해도 동쪽의 낙산(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과 함께 한양을 감싸 안은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가장 높답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을 대표하는 산의 지위를 누린 건 백악산이었지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송두리째 불에 타 폐허가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없이 터만 남은 궁궐 뒤에 쓸쓸히 서 있던 백악 대신 인왕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겁니다.

(좌) 정황, <청풍계>, 18~19세기, 모시에 엷은 채색, 22.7×1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장시흥, <창의문>,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채색, 19×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바로 화성(畫聖 : 그림의 성인, 즉 매우 뛰어난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었고요. 인왕산을 한양의 ‘랜드 마크’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겸재의 유산이었습니다. 인왕산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물론 인왕산 전경을 최초로 화폭에 아로새긴 화가 또한 겸재였으니까요. <인왕제색도> 덕분에 인왕산은 국보에 그려진 최초의 산이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지요. ‘인왕산 화가’ 하면 겸재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겸재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그를 따르고 본받은 화가들이 ‘겸재 화파’를 이룹니다. 겸재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손자 정황(鄭榥, 1735∼?)의 <청풍계>는 겸재의 그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꼭 닮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장시흥(張始興, ?~?)이라는 화가가 그린 <창의문>입니다.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지금은 자하문 고개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었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능선은 창의문을 기점으로 백악산으로 다시 솟구쳐 오릅니다. 역시 낙관만 가리면 영락없는 겸재의 그림입니다.

 

인왕산 전경을 담은 또 하나의 그림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엷은 채색, 36.6×53.7㎝, 개인 소장

겸재 이후 인왕산 전경을 그린 화가가 또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인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입니다. 위 그림이 강희언의 <인왕산도>인데요. 한눈에 봐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 눈에 띄지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역시 인왕산의 당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일 겁니다. 겸재의 인왕산은 실제 경치와 분명히 다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장 인왕산다운 인왕산을 그렸으니까요. 반면 강희언의 그림을 보면 산세는 물론 인왕산을 끼고 이어진 한양도성과 산 아랫마을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물결치듯 죽죽 뻗어 내려간 골짜기의 묘사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전통 한국화에선 볼 수 없었던 원근법을 적용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글씨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지금의 창의문 쪽 백악산 중턱에서 그린 것으로 봤어요. 500~6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때 인왕산의 전모가 한눈에도 적절하게 포착된다는 겁니다. 이태호 교수는 “강희언 그림에서 현대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 아래 흰 안개도 그렇지만 하늘을 마치 수채화 그리듯 시원하게 채색했다는 점이에요. 이 부분은 강희언의 직업과 연결해서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강희언은 열일곱 나이에 천문 지리 분야인 음양과에 급제한 뒤 관상감에서 관원으로 일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 직원 출신 화가라고 할까요. 자신보다 63살이나 많은 겸재와 이웃에 살며 그림을 배웠지만, 제자는 스승의 유산에 서양화풍을 과감하게 접목합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당시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평가가 적혀 있습니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겸재가 좋아 인왕산을 그리게 한 시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란 분이 있습니다. 명문세가 출신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우리 문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요.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만 3,000수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권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화가인 겸재 정선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이 차도 5살밖에 안 됐고요.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습니다. 제목은 ‘정선에게(寄鄭元伯)’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옥소북악십경》 (사진제공: 서울옥션)

권섭은 생전에 겸재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꼭 갖고 싶은 겸재의 그림이 있으면 손자에게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리게 해서 화첩으로 묶어 간직했을 정도니까요. 그 손자가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란 화가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권섭의 작품으로 소개된 《옥소북악십경》이란 8폭짜리 화첩이 출품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연히 권섭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손자를 시켜서 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옥소북악십경》을 자세히 검토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은 화풍으로 볼 때 권신응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왕산이 등장합니다.

권신응, <청풍계>,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화면 맨 위에 가는 먹선 두어 개로 쓱쓱 그어나간 능선 위에 한자로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산수화에다가 구체적인 지명을 써넣은 대표적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지요. 다분히 겸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도에 지명을 써넣은 당시의 경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지도가 아닌 그림에 인왕산 이름이 적혀 있는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이지요. 그 왼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인왕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백세청풍 바위의 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인왕산 청풍계는 당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장동파, 즉 장동김씨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세청풍 각자를 새긴 김상용은 인왕산 쪽에, 형보다 더 유명했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백악산 쪽에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김상헌은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 인왕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씁니다.

필운산(弼雲山)은 인왕산의 옛 이름입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가 깃든 터전이었으니 도성 안에서 얼마나 풍광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만하지요. 기왕 김상헌의 형 김상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풍계를 그린 작품을 한 점 더 볼까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청풍계첩(靑楓契帖)>이란 주목할 만한 시화첩이 소장돼 있습니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에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이름난 문인 7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고 하는데,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을 만나다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인왕산 아래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지요. 김상용의 집 태고정(太古亭)입니다. 이곳에서 모임을 연 겁니다.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계회를 연 뒤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상의 소장본만 집안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좌)백세청풍 각자 (우) 김상용 집터 표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상의의 증손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국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의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풍계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상용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을 뿐이지요.

권신응, <옥류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다시 권신응의 그림을 더 볼까요. 《옥소북악십경》 가운데 <옥류동>이란 작품에도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선명합니다. 그 아래로 죽 내려오면 또 다른 세 글자가 보이는군요. 수성동(水聲洞)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된 바로 그 수성동 계곡입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것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이름난 명승지였는지 알 수 있지요.

(좌)권신응, <삼계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우)권신응, <수문루>,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이 밖에도 《옥소북악십경》에는 크든 작든 인왕산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삼계동(三溪洞)은 지금의 부암동, 그러니까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 있는 그 일대 땅의 옛 이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수문루(水門樓)>입니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문은 홍지문(弘智門)이고, 그 왼편에 수문 다섯 개가 나란한 구조물은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문루 위에 적힌 세 글자는 한북문(漢北門)으로 홍지문의 다른 이름이고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능선을 타고 뻗은 한양도성이 부암동으로 내려와 홍지문까지 이어졌지요. 멀리 북한산 문수봉이 우람하고, 가깝게는 홍제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이곳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인왕산 바위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옥계시사와 임득명의 인왕산 그림

인왕산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서당 훈장 노릇을 하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란 분이 있습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으로 가난했지만 글 좋아하고 시를 무척 잘 썼다고 하지요. 조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서얼과 중인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조선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 특히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 즉 옥류동(玉流洞) 일대였어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 짓고 풍류 즐기는 이들 13명이 의기투합해 1786년 7월 16일 시 모임을 결성합니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사수계첩》, 종이에 엷은 채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그 해에 옥계시사 동인들은 자신들의 시와 그림을 엮어 책을 꾸밉니다.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수계첩(玉溪社修禊帖)》인데요. 여기에 옥계시사 동인이었던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의 그림 4점이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12폭이었다고 하는데 8점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림 4점 가운데 인왕산 그림 한 점은 각별하게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인왕산에서 즐기는 봄꽃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요. 갈지자(之)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붉은 꽃이 활짝 피어나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지요. 인왕산의 봄을 대표하는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임득명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은 더 있습니다. 옥계시사 결성 5년 뒤인 1791년에 꾸며진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에 임득명의 그림 11점이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첩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빛을 못 보다가 한국사학자 정옥자 교수가 《조선후기 중인문화연구》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인왕산의 야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이 만들어진 그해에 모임에 초청받은 전문 화가들이 또 다른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난데없이 왜 송석원시사로 이름이 바뀌었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옥계시사 결성을 주도한 천수경은 나중에 자신의 호를 송석원(松石園),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꿉니다. 옥계시사와 송석원시사는 결국 같은 모임으로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불린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작품은 밤 그림입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91년 6월 15일 유두날 밤,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 모임을 그린 작품이지요. 달빛 그윽한 밤에 당대의 시인과 문사 9명이 초가집 앞의 너른 뜨락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고상한 모임을 그린 이런 그림을 아회도(雅會圖), 또는 아집도(雅集圖)라고 부릅니다. 이 모임에 초청받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서예가였던 미산 마성린(1727~1798)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모임을 그리게 할 정도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마성린이 쓴 시의 내용처럼 여름밤의 아스라한 분위기가 깊은 운치를 자아내지요. 김홍도가 46세에 그린 이 작품은 한껏 무르익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송석원시사첩》,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개인 소장

여기에 김홍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입니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낮 그림이에요. 화면 왼쪽 너럭바위 위에 두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뒤로는 왼쪽에 인왕산, 오른쪽에 백악산이 솟아 있고 멀리 뒤로 삼각산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단짝 친구였던 이인문 역시 모임에 초빙돼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낮과 밤에 모인 장소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화폭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그윽한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배경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에는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좌)1950년대에 김영상이 찍은 송석원 각자 바위 (우)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 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송석원’이란 바위 글자는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32세 때 글씨라고 합니다. 이 바위 역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근처 어딘가에 바위가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일대 답사에 나선 이들은 보통 박노수미술관 근처에서 송석원시사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곤 하지요. 과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산

박제신, <서교전별>, 1826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3×31.8cm

옛 그림에서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지난해 말, 국내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인왕산 그림이 한 점 나왔습니다. 소향관 박제신(朴齊臣, 1792~?)이란 생소한 화가가 그렸다는 <서교전별(西郊餞別)>이란 작품인데요. 경매사 측이 소개한 그림 내력을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서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좌우 여백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요. 박제신은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손자였으니, 아버지 대에서 맺은 인연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런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경매사 측은 설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나 겸재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이 시대의 전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인왕산 그림을 더는 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왕산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옛 화가들이 그림 속에 남긴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었으니 한양 최고의 명승으로 각광받았을 수밖에요. 500년 조선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품은 채 그림의 소재로, 배경으로 널리 사랑받은 산이 달리 또 있을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