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어느 거지패 왕초, 조선 최고의 광대가 되다

2018/07/26

 

아주 오래전,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글 한 편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글의 제목이 <광문자전(廣文者傳)>이고, 지은이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란 사실은 물론 까맣게 잊었죠. 하지만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삶은 희미한 조각으로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더군요. ‘이야기’란 녀석은 심지어 까마득하게 먼 어린 시절에 주워들은 것도 그냥 지워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대단히 못생긴 주인공의 ‘외모’였지요.

광문은 외모가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이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습니다.

만석중놀이를 잘 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댔는데,
‘달문’이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만석중놀이는 해마다 음력 4월 8일 개성지방에서 행해진 무언 인형극입니다.
당대 최고의 기생 황진이의 미모에 홀려 파계를 하고 말았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속설도 있고,
불공 비용을 만석이나 받아먹은 지족선사의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놀이로 꾸몄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기억할 만한’ 추한 외모와 달리 너무나도 사려 깊고 인간적인 달문의 됨됨이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외모로 섣불리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 학창 시절에 배운(외운!) 이 글의 교훈이지요. 30년이나 묵은 저 머나먼 기억창고에서 느닷없이 이 글을 꺼내든 건 바로 그 달문을 주인공 삼아 써 내려간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이 쓴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에서 바로 그 못생긴 달문을 3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당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 달문

달문은 조선 후기의 실존 인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성은 이 씨로 1707년에 세상에 났고, 돌아간 해는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달문은 청계천 수표교 거지 패 왕초였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만 들어온 ‘거지 광대’ 달문을 열여섯 나이에 수표교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소설은 바로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큼지막한 탈을 쓰고 북을 두드리면서 다리 가장자리를 절름거리며 휘저었다.
왼손에 든 철봉은 북을 칠 땐 북채고 땅을 짚을 땐 지팡이였다.
또한 그 봉을 기둥처럼 다리 위에 세우고 몸을 날려 앞으로 돌고 뒤로 돌고 옆으로 돌았다.
반보만 헛디뎌도 개천으로 곤두박질칠 만큼 위태로웠다.

웃통은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바지도 갈가리 찢겨 허벅지와 무릎과 종아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쪽박 쓰고 손뼉 쳐 대는 아이들과 똑같은 몰골이었다.

거지 광대! 묵은 김치 같은 이름 하나가 내 가슴을 화살처럼 꿰뚫었다.

철봉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했지요. 소설을 읽다 보면 뒤에도 여러 번 다시 나오는 이 춤의 정체는 ‘철괴무’입니다. 철괴무를 얼마나 잘 췄던지 ‘철괴무의 달인’으로 불렸을 정도랍니다. 거지꼴을 하고 추기에 딱 알맞은 춤이 아니었을지요. 남루하다 못해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는 달문의 몰골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춤이 달리 또 있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철괴무’의 유래를 살펴보면 답이 명확해집니다.

(좌) 심사정, <철괴>, 비단에 엷은 채색, 29.7×2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김명국, <철괴>, 종이에 엷은 채색, 20.2×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위의 두 작품의 제목은 모두 ‘철괴’입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연담 김명국(金明國, ?~?)이 나란히 ‘철괴’를 그렸습니다. 머리와 수염은 삐죽삐죽 듬성듬성, 옷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가슴을 활짝 풀어헤친 품새 하며, 지팡이에 기대 절뚝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어느 화가가 달문의 초상화를 그렸다면 꼭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달문과 마찬가지로 성이 이 씨인 철괴가 이런 모습이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산속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철괴가 어느 날 노자(老子)를 만나러 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신신당부를 하지요. 몸은 이곳에 두고 혼만 다녀올 텐데, 만일 7일 안에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몸을 태우라고. 그런데 아뿔싸, 스승의 혼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곁에서 몸을 지키던 제자에게 별안간 늙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옵니다. 제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끝내 기다릴 수 없어 스승의 혼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몸을 불에 태우고 떠납니다.

뒤늦게 혼이 돌아와 보니 몸은 이미 불에 타 사라지고 없었지요. 철괴는 어쩔 수 없이 꾀죄죄한 거지 몸속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극적 효과가 덜 했을 겁니다. 거지 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철괴는 다른 몸으로 이사를 가려 합니다. 그런데 이때 노자가 나타나 한마디 하죠. 진정한 도는 외모가 아닌 마음에 있나니…. 그러곤 금테와 철 지팡이를 주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서 철괴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진정한 도인의 상징이 되어 도교의 신선으로 떠받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철괴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 바로 철괴무입니다.

내 두 눈이 광대의 콧잔등에 얹힐 정도로 들러붙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탈에서, 이마로부터 뺨을 지나 커다란 입술을 통과하고
턱에서 발등으로 뚝뚝 흐르는 땀을 똑똑히 보았다.

내가 못나디 못났다고 믿었던 탈은 거지 신선 이철괴(李鐵拐)의 탈이 아니라 거지 광대의 맨 얼굴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극적인 사연조차 어쩌면 ‘달문’과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것일까요. 철괴의 현신이 바로 달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에요. 게다가 달문의 철괴무는 당대의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백성들이 달문을 ‘철괴무의 달인’이라 부른 까닭을 짐작할 만합니다. 비단 철괴무만 잘 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달문은 뛰어난 춤 솜씨로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만능 연예인이었어요.

소설의 전반부에 좌우 두 날개, 즉 좌익과 우익으로 편을 나눠 대결하는 산대놀이 장면이 나옵니다. 산대놀이는 우리나라 민속 가면극의 하나로, ‘산대’는 특별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임시 가설무대를 뜻합니다. 연원을 따지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지요.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중국 사신을 맞을 때 공연되기도 했는데, 차차 민간으로 퍼져나가 백성의 놀이가 되고 자연스럽게 양반 계급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기게 됩니다.

달문은 이 대결에서 우익의 으뜸 광대가 되어 공연의 총연출자로 나섭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이 흥미진진한 놀이 대결을 묘사한 대목을 읽다 보니 숨 막히는 무대의 긴장감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더군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옛 그림 중에서 혹시 산대놀이를 그린 작품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조선 회화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산대놀이를 묘사한 그림은 분명 있습니다! 우리 그림이 아니라 중국 그림입니다.

《봉사도(奉使圖)》 제7폭, 1725년, 비단에 채색, 51×40cm,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소장

《봉사도(奉使圖)》는 조선 영조 1년(1725)에 조선을 다녀간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이 조선의 각종 의례 절차와 풍속 등을 담은 그림 20장을 묶어 펴낸 화첩입니다. 위 그림은 그 가운데 7번째 작품으로 중국 사신 일행을 영접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 중앙의 건물 안에 푸른 옷을 입은 이가 바로 중국의 사신이지요. 이 그림에는 중국 사신을 위해 광대들이 펼친 각종 연희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먼저 사신이 타고 온 가마 앞에서 한 광대가 접시를 돌리고 있지요. 마당 한가운데선 두 사람이 물구나무를 서고, 양옆으로 두 명씩 서서 탈춤을 추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선 줄타기 공연이 한창이고, 화면 오른쪽에는 두 바퀴 달린 장치가 보이고요. 예산대(曳山臺)라 부르는 이동식 공연무대입니다. 기암괴석 모양의 무대 사이사이에 난 작은 구멍마다 공연을 위한 작은 인형들이 숨어 있네요. 산대에 설치한 인형들을 움직이며 즐기는 이런 놀이를 ‘잡상놀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산대놀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사내는 꼭대기에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오며 꽃다발을 여인들에게 내밀었다.
여인들은 그것을 받지 않고 펑펑 폭죽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장미와 함께 등장했던 붉은 치마저고리 여인은 사라지는 대신 팔을 뻗어 꽃다발을 받았다.
그녀가 장검을 뽑아 휘두르자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피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산대에서 몸을 날려 공중제비를 돌며 땅으로 내려섰다.

잡상인 줄로만 여겼던 그들은 사람이었다.
여인은 검무의 달인 운심이었고 검은 얼굴의 사내는 이 모두를 설치하고 조종한 달문이었다.

《봉사도》의 예산대를 자세히 보면 갖가지 인물 형상을 한 잡상들이 보이지요. 그런데 달문은 잡상 대신 광대들을 직접 출연시켜 전무후무한 산대놀이를 만천하에 선보입니다. 연출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산대놀이를 이렇게 구체적인 묘사한 그림은 전에도 후에도 없습니다. 참고로 이 화첩의 제11폭에도 광대가 등장합니다. 기다란 장대 위에 올라가 갖가지 재주를 펼치는 놀이인데요. 솟대 타는 장면은 불교 그림에도 제법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활동한 유명한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 ?~?)도 솟대놀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좌) 《봉사도(奉使圖)》 제7폭, 1725년, 비단에 채색, 51×40cm,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소장
(우) 김준근, <솟대장이 놀고>, 조선 말기, 종이에 엷은 채색, 28.5×35cm, 독일 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소장

 

최고의 산대놀이 대결을 위한 비장의 카드,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

소설 속에서 매설가(賣說家), 즉 소설가를 꿈꾸는 ‘나’는 달문의 공연을 보다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달문이 산대에 펼쳐 놓은 이야기가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 <구운몽>이었기 때문이지요. 달문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산대놀이를 보며 ‘나’는 왜 그토록 소설가가 되려 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결국 모든 예술은 뿌리로부터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자고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힌 수천 혹은 수만 명의 독자가
문장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울고 웃으며 각자의 삶을 뜨겁게 뒤돌아보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달문의 산대여! 모독의 소설이여! 달문과 모독의 이야기여! 무궁무진 나아가라! 활짝 꽃피어라!

김탁환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2002)의 주인공이 바로 <구운몽>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었지요. 서포의 다른 소설 <사씨남정기>의 집필에 얽힌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화자 이름이 바로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화자인 ‘나’의 필명과 똑같은 ‘모독’입니다. 같은 작가의 두 소설은 16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렇듯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달문은 최고의 산대놀이 대결을 압승으로 이끈 바로 그 무대에서 <구운몽> 이야기를 펼쳐 보인 데 이어 본의 아니게 역모 사건에 휘말려 유배됐다가 돌아와 마지막 산대놀이에서 다시 한번 <구운몽>을 재현합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구운몽>이었던 것이지요. 모든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해져만 가는 최후의 산대놀이를 지켜보며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병신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 되어 버린 자의 몸부림도 과연 춤인가.
춤이 될 수 있는가. 아름다울 수 있는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서포의 <구운몽>은 얼마나 유명했던지 심지어 영조 임금조차 읽고 “아주 좋다(極好矣)”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화가들의 그림으로도 굉장히 많이 그려집니다. 이런 그림을 <구운몽도>라고 부르는데요. 지금까지 발견된 <구운몽도>가 30편이 넘고, 심지어 일본에도 그림이 남아 전해질 정도랍니다. 이 가운데 가회민화박물관에 소장된 8폭짜리 병풍을 보면, 여덟 번째 그림에 칼춤을 추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회민화박물관에 소장된 8폭 병풍 <구운몽도>의 제 8폭 그림 부분

양손에 칼을 든 채 추는 쌍검무(雙劍舞)입니다. 이 그림에서 쌍검무를 추는 여인은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의 다섯째 첩인 심요연입니다. 심요연은 어릴 때부터 익힌 무술 솜씨로 토번국의 자객이 돼 토번을 정벌하러 나선 당나라 장수 양소유를 찾아갑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월왕과 가무 대결을 펼칠 때, 뛰어난 검무 솜씨로 양소유를 돕게 되지요. 심요연의 신들린 검무를 본 월왕은 인간이 아닌 신선의 춤사위라며 감탄을 쏟아냅니다.

김탁환의 소설에는 달문과 같은 시대에 검무로 천하제일이란 명성을 얻은 밀양 기생 ‘운심’의 춤사위가 여러 차례 자세하게 나옵니다. 내키지 않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버티던 당대 최고의 기생 운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달문뿐이었지요. 당대 최고의 광대가 치는 북소리에 맞춰 운심은 보는 이의 혼을 빼앗는 검무를 선보입니다. 소설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습니다.

방 한가운데로 돌아온 운심의 다리와 팔이 따로 놀았다.
다리가 동쪽으로 향할 때 칼끝은 서쪽을 향했고, 다리가 서쪽으로 뻗을 때 칼끝은 동쪽을 노렸다.

팔다리가 따로 놀았지만, 운심의 몸은 흐트러지지 않고 흐름을 탔다.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기운이 넘쳤다.

일곱 왈자뿐만 아니라, 방금까지 언성을 높였던 망둥이도
대문에서 앞을 막아섰던 태식도 또 울며 나를 찾아왔던 혜정까지도
달문의 북과 운심의 검무에 취했다.

도대체 어떤 춤이었기에 넋을 잃게 만들었을까요. 달문이 유랑단을 꾸려 흉년이 가장 심한 고을만 돌며 일종의 지방 순회공연을 펼칠 때도 운심은 끝까지 함께 합니다. 일편단심 달문을 향한 마음을 간직한 채 말이지요. 유랑단의 공연 역시 평생토록 한 번 볼까 말까 한, 운 나쁘면 돈 주고도 못 본다는 운심의 화려한 검무로 시작됩니다. 아마도 혜원 신윤복의 저 유명한 그림 <쌍검대무>에 보이는 곱디고운 자태가 아니었을까요.

<쌍검대무>,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람’ 이야기

달문은 천의 얼굴을 가진 기인(奇人)이었을 겁니다. 그 이름 두 자에 붙은 수많은 수식어가 증명하듯 말이지요. 거지 달문, 광대 달문, 점원 달문, 조방꾸니 달문…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에 ‘사람 달문’이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가장 큰 담보가 되는 ‘신뢰’의 인간 달문은 소설 속에서 몇 번이고 평범한 이들을 넘어서는 ‘큰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유랑단을 꾸려 스스로 구휼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일화이지요.

당대 제일의 광대라는 자부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산대놀이 대결에서 큰돈을 번 달문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선배 원로 재인들을 찾아가 돈을 모두 나눠줍니다. 광대로 태어나 뼛속까지 광대였던 달문이었지요. 소설의 화자인 나 ‘모독’이 그렇게 돈을 죄다 써버린 까닭을 묻자 달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을 많이 지닌 자가 부자가 아니라, 그 돈을 남에게 많이 준 자가 부자입니다.
오늘 밤, 저보다 더 많은 돈을, 그 돈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준 사람은 없겠죠?
그러니까 오늘은 이 나라에서 제가 제일 부자인 겁니다.”

그런 달문이 당시 백성의 영웅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저잣거리에 명성이 자자했으니 조수삼의 <추재기이>,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같은 기록에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겠지요. 광대로서 뛰어난 재주뿐이었다면 글쎄요, 이 정도로 옛사람들이 각별하게 기억하고 기록하진 않았을 겁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됨됨이로 많은 이를 웃고 울게 했고 진한 감동을 주었기에 인구에 회자되고 오랜 세월 기억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작가 미상의 <회혼례도>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가 미상의 8폭 병풍 <회혼례도>를 보면 큰 잔치에서 노는 광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특히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독특한 옷차림을 한 채 흥에 겨운 춤사위를 풀어내는 광대의 동작이 무척 생동감 넘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광대 달문의 표정과 눈빛, 몸짓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온 세상을 다 끌어안을 것처럼 힘차게 두 팔을 벌린 채 더덩실 흥겨운 춤사위에 빠진 달문의 모습을 말이에요.

소설의 화자인 나 모독은 정말 간절하게 소설가의 길을 꿈꿉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모독에게 ‘정말 가슴 뛰는 일’이어서,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심장이 요동을 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소설에 빠지는 것을 담배 중독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석 달 세책방 출입을 금지당한다는 것은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말이지요. 그런 그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자극을 준 것이 바로 달문이었습니다.

“간, 쓸개, 내장 다 드러내 놓아야 이야기할 맛이 나는 법입니다.”

달문은 호기심이 넘치는 거지였지요. 글을 읽지는 못해도 말하는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가슴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묘한 재주를 지닌 것으로 그려집니다. 재담꾼 달문이 매설가를 꿈꾸는 모독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이야기 고픈 건 못 참겠습니다.
오늘 밤엔 이야기 한 바가지 푸짐하게 먹었으면 싶습니다.”

모독은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렇게 해서 몇 줄 안 되는 기록에서 확인한 어느 광대의 아름다운 삶을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달문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할 수 있는 건 말할 수 없이 강한 인간의 체취 때문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매설가 모독과 소설가 김탁환에게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동기가 아니었을까요.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달문의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리며 수표교 언저리를 잠시 두런두런 거닐었습니다. 그 옛날 달문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변했지요. 하지만 소설과 소설 속 소설을 모두 읽은 뒤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이야기는 진하게 남는다는 것을 말이에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