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왜 우리는 유독 파란색에 매혹되는 걸까?

2018/08/31

어떤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미술에 까막눈이었던 제겐 그런 강렬한 첫 만남의 추억이 있답니다. 아, 그때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춘 순간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던 그 신비로운 경험을 말이지요.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광선처럼 스쳐가는 찰나의 감성이랄까요. 마치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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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코리안 랩소디>라는 기획전시를 취재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주요 미술 작품으로 조망해보는 야심만만한 전시회였는데요. 손에 꼽히는 걸작들이 즐비한 속에서 유독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그림이 한 점이 있었지요. 난생 처음 들어본 화가의 이름은 강요배. 그림 제목은 <한라산 자락 사람들>이었습니다.

강요배, <한라산 자락 사람들>, 1992년, 캔버스에 아크릴, 112×193.7cm

제주 4·3 사건 연작의 하나인 이 작품에서 저를 단박에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푸르른 한라산이었습니다. 물감으로 저런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세상에는 수많은 색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랑이 있고요. 하지만 강요배의 파랑은 그때고 지금이고 제게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파랑이에요. 그 모든 걸 안다는 듯 저 혼자 의연하게 오롯한 푸름을 간직한 산. 파랑은 그렇게 강렬하게 제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파랑은 언제부터 각광받기 시작했을까?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뭔가요? 아마 사람마다 대답은 천차만별일 겁니다. 그 이유도 각양각색일 테고요. 다섯 살 난 제 첫째 아이는 저만큼, 아니 저보다 몇 배는 더 파랑을 좋아합니다. 옷부터 가방, 식기류에 장난감까지 온통 파랑 일색이지요. 심지어 과자를 살 때도 포장지가 파랑이냐 아니냐를 가장 먼저 따집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파랑을 그토록 사랑하게 된 걸까요. 부모인 저도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무척 궁금할 때가 많거든요.

작가 미상, <영국의 왕 리처드 2세를 위해 그려진 두 폭 패널화>,
1395~1399년, 패널에 템페라, 각 53×3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실 인류가 수많은 색 가운데 파랑을 지금처럼 널리 사랑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랍니다. 지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파랑은 도처에 널려 있었어요. 고대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파란 하늘, 파란 바다를 보며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중세에 들어서까지도 파랑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색깔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천대받던 파랑이 색채의 세계에서 급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바로 성모 마리아 그림입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세사 연구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파랑의 역사>란 흥미로운 책에서 12세기부터 성모의 푸른 옷이 그림에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걸 계기로 과거에 홀대받던 파랑이 성모 마리아와 결부된 ‘신성한 푸른색’으로 탈바꿈하게 되지요. 청색에 대한 중세인의 인식은 성모 숭배와 더불어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신성한 색은 더 나아가 왕의 색으로도 각광받게 됩니다. 경건함과 고귀함의 상징이 된 거죠.

 


(좌)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년, 캔버스에 유채, 44.5×39cm,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우)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1664년, 캔버스에 유채, 49.6×40.3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소장

유구한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진정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파스투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를 첫손으로 꼽습니다. 페르메이르가 누구냐고요? 저 유명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입니다. 파스투로는 이렇게 단언하죠.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페르메이르처럼 청색을 섬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고.

“안료(청금석, 남동석, 산화코발트)들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통해 청색 계통에 관해서는 페르메이르가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아무 혁신도 일으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색칠을 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재료를 굉장히 까다롭게 다뤘다는 것과 청색의 대담한 터치에 흰색이나 회색 또는 노란색의 섬세한 붓놀림을 통해 ‘옷을 번쩍거리게’ 장식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구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 이제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어떠신가요? 특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수없이 복제되고 대중화된 덕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그 시대에 저토록 세련된 푸른색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에게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보입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은 또 어떻고요. 그 어떤 색으로 대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줄 알았던 페르메이르는 진정 ‘청색의 화가’였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만난 파랑의 매혹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은 어떨까요. 조선시대에도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청색을 유달리 잘 구사한 화가는 없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옛 그림에 관한 숱한 자료를 뒤적거려 봤습니다. 하지만 과문한 탓에 우리 옛 그림의 색채만을 따로 떼어서 연구한 책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특히 파랑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에서 주유청강(舟遊淸江)

그럼에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기억할 만한 파랑을 구사한 화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을 들고 싶습니다. 지난해였던가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특별전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 정선>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는 신윤복의 그림이 그날은 전혀 다르게 보였거든요. 그림이라는 것이 볼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곤 한다는데, 그때는 유독 혜원 풍속화에서 ‘색’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겁니다.

저 시대에 저토록 색을 모던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니. 넋을 놓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파란색이 의외로 참 많이 쓰였습니다. 채색에 주목하지 않으면 잘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 부분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혜원 풍속화를 색깔 위주로만 찬찬히 들여다보셨으면 합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신윤복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유청강(舟遊淸江)이란 작품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 그림의 기조를 이루는 색은 보시다시피 파랑입니다. 기생들의 치마 색깔을 보세요. 같은 파랑인데도 농담을 조금씩 달리했지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처럼 설치한 차일 가장자리에도 푸른 물을 들여놓았네요. 심지어 배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돕니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어쩜 그렇게 긴 세월에도 파랑의 신선함이 도드라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들은 파랑 물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선 시대 궁중 회화부터 불교 회화에 이르기까지 청색은 채색화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청색은 오방색의 하나로 예로부터 궁궐의 목조건물 단청에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색깔이었죠.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형형색색 다양한 채색 물감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 썼을까요. 궁금증을 품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차에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쓴 <책벌레와 메모광>이란 흥미진진한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났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는 주로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지만 화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의 각종 빛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적은 기록도 보인다. <철경록(輟耕錄)>이란 책을 읽다가 여러 빛깔의 물감 제조 방법에 관한 내용에 흥미를 느껴 메모장을 만들어두었다. 그 뒤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에서 비슷하지만 설명이 훨씬 구체적인 대목을 하나 더 찾았다. 그래서 이 두 메모를 합쳐서 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두 자료가 한데 묶이고 보니, 동양화의 물감 제조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아주 요긴하고 귀한 자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로 조선 시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광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위 인용문에 소개된 <앙엽기>는 이덕무가 펴낸 기념비적인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총 8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온갖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지식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잡학사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 그림물감 제조법에 관한 글도 있습니다. ‘화가(畫家)에게 소용되는 그림물감(畫家顔色)’이란 제목으로 <앙엽기> 제7장에 스물한 번째로 실려 있지요.

위 인용문에서 이덕무가 읽었다는 <철경록>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저술가인 도종의(陶宗儀)라는 분이 펴낸 수필집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원나라의 법률 제도 및 서화문예(書畵文藝)의 고정(考訂) 따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아 원나라 때의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돼 있습니다. 1366년에 완성했고, 모두 30권인데요. 이덕무가 이 책에서 물감 제조법에 관한 대목을 읽고 적어두었다가 자신의 책에 수록한 겁니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별의별 색깔이 다 있더군요. 그중에서 청색과 관련한 대목만 추려 보겠습니다.

남청색(藍靑色)은 삼청(三靑)에다 고삼록(高三綠)을 넣어 조제하고,
아청색(鵝靑色)은 소청(蘇靑)에다 나청(螺靑)을 곁들여 조제하고,
대저 물감을 조제 사용하는 데 섬세한 색상으로는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심중청(心 中靑)·천중청(淺中靑)·
나청(螺靑)·소청(蘇靑)…

채색 물감을 만드는 데 ‘조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 옛날의 그림물감 재료는 상당 부분 약재(藥材)였습니다. 그래서 물감을 만드는 것이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조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니 정성도 정성이었겠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위에 열거된 용어들을 전부 다 이해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절대 무리입니다. 다만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는 쓰인 석청(石靑)이라는 재료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인 재료는 구리 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입니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을 보면 국내에서도 삼청의 재료인 토삼청(土三靑)을 캤다는 기록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바로 석청이라는 물감 재료입니다. 옛사람들은 이걸 적절히 가공해서 다양한 청색을 만들어 썼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를 보면 바로 그 물감 제조법을 <개자원화보>(‘개자원화전’이라고도 합니다.)란 책에서 읽고 옮겨 놓았습니다. <개자원화보>는 청나라 화가 왕개(王槪)가 지은 회화 입문서인데요. 그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미술책이었습니다. 이 책에 그림물감의 재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석청(石靑)은 이른바 매화편(梅花片)과 같은 일종(一種)만이 여기에 소용되는데, 그 모양이 조각(片)으로 되어 매화편과 비슷하므로 이른 말이다. 석청을 조제할 적에는 사기그릇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 부어 휘저은 다음 채취하는 데 맨 위에 자리 잡은 가루는 유자(油子)란 것으로 의복에 들이는 물감으로 쓰이고, 중간에 자리 잡은 것은 가장 좋은 석청으로 정면(正面)으로 된 청록색(靑綠色)의 산수(山水)를 그리는 물감으로 쓰이고, 맨 밑에 자리 잡은 것은 협엽(夾葉)을 상감(象嵌)하거나 견첩(絹帖)의 후면(後面)에 바르는 데 쓰이는데, 이것을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이라 한다.

물을 부어서 잘 저은 다음 높이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재료를 채취해서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한다는 겁니다. 맨 밑에 가라앉은 것을 채색 물감 재료로 썼다는 거지요.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장 널리 쓰인 청색 물감 재료는 위에 보이는 삼청(三靑)과 청화(靑花)였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나란히 등장시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도 물감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요.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도화서) 화원들이 색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색을 내는 안료를 구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쪽과 함께 푸른색을 내는 석청(石淸)은 중국에서도 멀리 서역 너머에서 들여왔다. 황색을 내는 등황은 안남(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섬나라의 나무에서 채취해야 했다. 구하기도 힘들지만,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가격도 천정부지였다. 돈 많은 양반의 초상화나 어진을 그릴 때는 그나마 구하기 쉬운 황색 계통의 안료가 쓰일 따름이었다.”

그만큼 채색 물감은 참으로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였던 겁니다. 게다가 병을 고치는 약재를 제조하듯 만드는 데도 갖은 정성을 들였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재료로 곱게 색을 입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옛 그림을 더 깊이 음미하고 사랑할 수밖에요. 다시 혜원 신윤복의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혜원은 ‘파랑’을 즐겨 쓴 화가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보아도 저 색채 감각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서울의 랜드마크 인왕산을 물들인 ‘풍류 블루’

지금이야 물감 자체가 워낙 구하기도 쉽고 종류도 다양해졌잖아요.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예 돈이 없다면 모를까 물감 못 구해서 그림 못 그린다는 화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파랑을 주로 사용하는 화가들은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오로지 파란색만을 고집하는 화가도 꽤 있고요.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 어느 화가의 파랑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습니다.

한국화가 조풍류 화백은 근래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 특히 한국화가 중에서 파란색을 가장 즐겨 쓰면서도 남다른 깊이를 보여주는 화가입니다. 2015년 겨울, 서울 인사동의 한 전시장에서 화가를 처음 만났는데요.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 가운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인왕산 그림이었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인왕산의 야경에 넋을 잃을 정도로 빨려 들어갔지요. 실로 눈부신 블루였습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캔버스에 먹 호분 분채 석채, 140×220cm

제가 아는 한 조풍류 화백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왕산 화가이기도 합니다. 푸른 인왕산 하면 대번에 조풍류라는 화가를 떠올릴 정도이지요. 사실 인왕산을 그리는 화가는 의외로 꽤 많습니다. 인왕산 기슭에 깃들어 사는 화가도 많고요. 하지만 인왕산의 야경을 이토록 아련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 화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조 화백의 인왕산 그림은 보시는 것처럼 파랑이 주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어느 미술사학자는 그 파랑에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풍류 블루’라고.

사진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직접 그림 앞에 서면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저 파랑 속에서 무수한 색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지요. 이 그림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열 일 제쳐두고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산 아래로 점점이 불을 밝힌 인왕산 어귀 마을이 마치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아련한 풍경. 겸재 정선의 저 유명한 <인왕제색도>가 그 시대의 인왕산이라면, 조풍류의 <인왕산>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인왕산입니다.

파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색깔이 된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하지요.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오래 봐도 지루하지 않고 눈이 피로하지 않다는 걸 테고요. 금방 식상해지지도 않을뿐더러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최근에는 파랑이란 색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단 하나의 색, 그 이름은 ‘파랑’입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한지에 먹 호분 분채 석채, 60×30cm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