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이순신 신화’와 ‘이순신 리더십’

2019/04/25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만회한 것은 실로 조선의 넬슨, 이순신의 웅대한 지략이었다.”

“이순신은 담대하고 활달함과 동시에 정밀하고 치밀한 수학적 두뇌를 지녔다. (…) 조선의 안녕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이순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찬양한 문구들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조선시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시대의 군인이나 역사학자?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그럼 누굴까? 놀랍게도 일본인들입니다. 첫 문장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 해군의 대표 이론가였던 사토 데쓰타로, 둘째 문장은 같은 시대의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 마지막 문장은 동시대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문필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가 쓴 겁니다.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일본인

몰랐던 사실 하나.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사람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는 1892년에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일본 수군의 활동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의 업적을 조명한 글인데요. 이 소책자가 중요한 건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이순신 신화가 만들어지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인 단재 신채호의 《수군제일위인 이충무공전》(1908)이 나오기까지는 16년을 더 기다려야 했죠. 《조선 이순신전》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 영웅 넬슨 제독과 비교한 최초의 기록이란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이순신 연구에 열을 올렸을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동아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군사력 강화, 특히 해군력 증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본 겁니다.

결국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더 나아가 신(神)으로까지 받든 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런 평가와 기록들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민족의 영웅으로 존숭하기까지 일본인들의 연구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고요. 그런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퇴색되는 건 결코 아니니까요.

《충무공이순신전서》(1795)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모습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 ‘거북선’

일본인들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꽤 많다는 점입니다. 사토 데쓰타로는 이순신 장군이 “독창적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며 그 대표적인 근거로 “거북선이라고 일컫는 신식 전함을 건조”한 점을 꼽았습니다. “오늘의 전투함의 효시”라면서 거북선의 제원과 운용 원리를 설명한 뒤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부터 4백 년 전에 장갑전함을 만든 것은 세계의 누구라도 놀랄 일이다.”

《조선 이순신전》에도 거북선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순신은 임지로 부임하자마자 필생의 생각을 응축하여 거북선을 창제하였다.” 앞의 글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거북선의 외형과 운용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뒤로 옆으로 움직이는 신속함이 나는 새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북선을 꼽았습니다. “거북선을 창제하여 공격의 이기(利器)를 교묘히 활용하였다.”

 

이순신에 관한 일본인들의 글을 묶은 책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도 거북선을 언급했습니다. “그(이순신)가 일찍이 창조해 만든 거북선을 선두에 세우고 좌우에서 협공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함대는 사분오열해 다시 결집할 틈도 없이 크게 격파당하였다.” 지금은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게 정설이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거북선 창제’라는 업적이 ‘이순신 신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겁니다.

일본인이 쓴 글 세 편을 묶은 책이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됐습니다.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번역자 김해경 씨는 여러 경로로 자료를 찾고 모으는 우여곡절 끝에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쓴 이순신에 관한 글 세 편을 찾아냅니다. 이 글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온전한 번역으로 선보이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군요. 그런 만큼 책을 읽는 내내 왜 진작 이런 글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죠.

 

(좌)월전 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현충사 소장)
(우)《증정 중등조선역사》(1946)에 실린 이순신 장군 초상화 (서울교육박물관 소장)

혹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이순신 초상 하면 바로 이 모습을 대번에 떠올리실 겁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2년에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입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가면 사당 안에 바로 이 영정이 걸려 있죠. 우리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장우성 화백의 과거 친일 행적 때문에 표준영정을 교체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진짜 얼굴은 어디에?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자가 혹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죠. 2013년에 한 언론이 이순신의 진짜 얼굴을 찾았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한 적도 있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이 소장한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다는 거였죠. 중요한 사료이긴 하지만 워낙 사진이 흐릿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로 전하는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입니다. 이 그림은 동아대학교 정재환 초대총장이 1958년 4월 16일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정 총장으로부터 구입 경위를 들었다는 당시 대학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던 어느 승려가 처음 그렸고 이후에 여러 번 다시 그렸다는 겁니다. 이 그림은 후대에 다시 베껴 그린 것으로 그 시기는 조선 말기로 추정된다는 내용입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수책거적(守柵拒敵)>

궁금증이 또 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없을까? 놀랍게도 그런 그림이 딱 한 점 있습니다.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입니다. 이 책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그린 역사화 여덟 폭을 묶은 화첩인데요. 이 중에서 수책거적(守柵拒敵)이란 이름의 일곱 번째 그림에 바로 이순신의 무훈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조 20년인 1587년, 함경도 지방의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해 노략질을 하자 당시 이곳을 지키는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이 전투에 나섰습니다. 병사들이 들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여진족이 목책을 공격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는 여진족을 활로 쏘아 죽이고 달아나는 여진족을 추격해 붙잡혀간 농민을 데려왔다는 것이 이 그림의 내용입니다. 이순신에 관해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조선시대 역사기록화입니다.

영화 <명량>(2014)

‘이순신 신화“는 끝없이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2000년 이후만 보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로 KBS의 역사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2004년부터 이듬해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됐죠. 소설가 김탁환이 8권으로 집필한 동명의 소설이 같은 해에 출간됐습니다. 앞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2001년에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명량>은 관객 1761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웁니다.

 

 


소설가 김훈이 말하는 이순신의 ‘리더십’

시간이 흐를수록 ‘이순신 신화’는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리더십을 이 시대가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얼마 전에 출간된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내 마음의 이순신’이란 글 두 편이 실려 있더군요. 이순신에 관한 소설을 쓴 작가로서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면밀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여러 대목 가운데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그가 받아들이고 긍정했던 ‘사실’들은 압도적으로 열세인 군사력, 물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부하들의 이탈과 명령 불복종, 전쟁을 지원해야 할 행정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자 된 자질은 이 절망적인 역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리더십에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대목은 이 전환의 국면 속에서 작동되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순신의 탈정치적인 생애와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는 지휘 스타일은 리더십의 본질이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리더십’에 대한 시대적 요구나 갈망이 아니라면 ‘이순신 신화’가 갈수록 더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죠.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읽은 두 권의 책에서 다시 만난 이순신. 새삼 의문이 들더군요. 우리는 이순신을 안다고 철석 같이 믿어 왔지만, 사실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난중일기》를 펼쳐듭니다. 474년 전에 이 땅에 온 한 위대한 영혼이 써내려간 그 숱한 나날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말이죠.

김훈의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2019)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