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조선의 희망’이었던 비운의 왕세자 효명을 만나다

2019/07/23

효명세자의 얼굴을 아십니까? 아신다고요? 드라마에서 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효명세자는 박보검이었습니다. 박보검이 곧 효명세자죠. <구르미 그린 달빛>이란 드라마가 그리 만든 겁니다. 박보검이란 배우의 얼굴로 각인된 효명세자의 이미지는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되겠죠. 18살 효명세자를 그린 초상화가 불에 타버려 눈썹 끝자락만 간신히 남았으니, 화마에 사라진 그 얼굴은 그저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효명세자는 자기 초상화를 보고 이런 글을 남겼죠.

 

<효명세자 초상화> 부분, 조선 1826년, 비단에 채색, 잔존부분 147.0×44.0cm, 국립고궁박물관

이름은 이영(李旲). 클 영(旲)이란 이름자처럼 크게 되었을 사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등등. 할아버지는 정조, 아버지는 순조. 1809년 8월 9일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그토록 귀했다는 적장자(嫡長子, 정실에게서 난 장자)였으니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겠어요. 효명은 4살에 왕세자가 되었고, 9살에 문묘(文廟)에서 입학례(入學禮)를 행했으며, 11살에 경희궁에서 관례를 치르고 그해 풍양 조 씨 조만영의 딸과 결혼합니다.

 

 


미래의 군왕이 될 재목으로 자라난

왕세자

효명세자는 어릴 때부터 출중한 문학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며 아버지 순조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시켜줄 미래의 군왕으로 무럭무럭 커나갔다고 하죠. 한창 배움에 매진하던 시절 효명세자가 쓴 글씨가 여러 점 남아 있는데요. 효명세자에 관련된 다른 유물도 물론 한 점 한 점 소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효명의 글씨를 가장 눈여겨봤습니다.

<효명세자 글씨>, 조선 1816년, 종이에 먹, 60.0×50.3cm, 국립중앙박물관

딱 8살 어린이의 글씨죠. 크기도, 굵기도 제각각인 글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야무진 입을 앙다물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갔을 8살 세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를 위한 별도의 교육 제도가 갖춰져 있었습니다. 서연(書筵)이라고 하는데요. 8살의 세자는 서연에 참여한 홍희조라는 관리에게 세 번 글씨를 써서 내려줍니다. 그래서 사진에 보이는 글씨가 줄마다 조금씩 다른 겁니다. 맨 오른쪽의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는 말 그대로 장수하고 부자 되고 아들 많이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구절입니다.

그 다음의 거재자팔원팔개(擧才子八元八愷)는 팔원팔개처럼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쓰라는 구절이고요. 셋째, 넷째 줄은 중국 요순시대 시구에서 발췌한 것으로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남풍이 때에 맞게 불어오도다.’란 뜻입니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겠지요. 초등학교 1학년 공책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함이 깃든 글씨. 획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다 보니 절로 미소가 피어납니다.

<효명세자 글씨>, 조선 1819년, 종이에 먹, 28.7×24.8cm, 국립중앙박물관

무럭무럭 자라 11살이 된 효명 어린이의 글씨. 3년 전과 확실히 달라졌죠? 제법 격조도 있고 힘도 느껴집니다. 위 글씨와 마찬가지로 효명세자가 11살에 서연에 참여한 박영원이라는 관리에게 써서 내려준 글씨입니다. 이 구절은 《논어》의 <옹야(雍也)>에서 따온 것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세자의 영특함이 흐뭇했을 신하들은 이렇게 세자가 내려준 글씨를 고이 모셔뒀다가 훗날 책으로 만들어 간직합니다.

 

 


스물두 해를 살면서 이뤄놓은 업적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사람들은 무척 아쉬워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효명세자가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꿈꾸던 대로 임금이 되어 할아버지 정조의 대를 이어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다면, 이 땅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작 22년을 살면서도 400여 편이나 되는 시(詩)를 남겼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던 효명의 이른 죽음은 그래서 더 큰 안타까움을 부릅니다.

<효명세자의 편지글>, 조선 1814~1827년, 종이에 먹, 친환경농업박물관

특이하게도 친환경농업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효명세자의 편지글 가운데 석 점을 골라 봤습니다. 모두 큰외삼촌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들인데요. 왼쪽 것은 6살 때 큰외삼촌에게 당과(糖菓)를 보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사탕이겠죠. 사탕 좀 보내주세요, 하고 조르는 6살 효명 어린이의 간절함이 눈에 선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효명세자의 글씨로는 가장 어릴 때 쓴 글씨가 아닌가 합니다. 6살 어린이의 글씨답지 않게 참 단정하죠?

가운데 편지에는 효명이 18살 때 외조부의 생신을 축하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편지는 정확히 스무 살 때 쓴 겁니다. 해가 갈수록 글씨도 날로 원숙하게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살필 수 있죠. 글씨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열여덟, 스무 살 청년 효명의 글씨는 절도 있고 유려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래 글씨를 보면 더 실감이 나실 겁니다.

(좌)<효명세자가 글씨를 쓴 서희순의 호>, 조선 1829년, 종이에 먹(탁본), 35.3×24.7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우)<춘방 현판>, 조선 1829년, 나무, 78.1×122.4cm, 국립고궁박물관

 

왼쪽 글씨는 효명세자가 관료였던 서희순에게 그의 호인 우란(友蘭)이라는 글씨를 써서 내려준 것을 탁본한 겁니다. 오른쪽 상단의 두 글자는 예필(睿筆), 즉 세자의 글씨라는 뜻입니다. 왕의 글씨는 어필(御筆)이라고 하죠. 오른쪽 사진의 현판도 효명세자의 글씨입니다. 역시 오른쪽 위에 예필(睿筆)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죠. 수염도 나고 제법 군왕의 태가 갖춰지던 시기의 효명이 쓴 단정한 글씨에서 한창 물오른 ‘젊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일찍이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며 한창 국가경영의 경험을 쌓아가던 효명은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인 1830년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효명이란 이름은 사후에 아버지 순조가 내려준 시호(諡號, 사후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뜻을 이어 사업을 이뤘다는 뜻에서 효(孝), 사방에 빛을 비춘다는 뜻에서 명(明)이라 했다지요. 궁중의 큰 행사가 있으면 직접 행사에서 선보일 공연을 창작해서 새롭게 선보일 정도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음악적 재능에 연출가로서의 재능까지 겸비했다고 할까요.

 


죽어서야 왕이 되고, 황제가 되다

그 안타까운 죽음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기죠. 살아생전에 왕이 되지 못한 효명은 아들 헌종(憲宗)이 왕이 된 뒤 익종(翼宗)으로 추존(推尊, 받들어 올림)하면서 죽은 뒤에 왕이 됩니다. 그 뒤에 효명세자의 양자였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해 황제가 되죠. 사후에 추존된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종묘 정전에 위패가 모셔졌고, 열다섯 차례에 걸쳐 덕을 기리는 존호(尊號)를 받아 종묘에 모셔진 조선 임금 가운데 어보(御寶)와 어책(御冊)이 가장 많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문예 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은 그렇게 짧은 생을 살다간 효명세자의 삶과 업적을 돌아보는 아주 특별한 자리입니다. 얼굴이 불에 타 지워진 초상화 앞에 서서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죠. 얼굴이 남았다면 효명세자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그려보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제가 주목한 것이 바로 효명의 글씨였습니다. 그 글씨들 속에서 여섯 살 효명, 열한 살 효명, 스무 살의 효명을 만났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