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빙수계의 에르메스? 그럼 나는 장 폴 고티에?

빙수야 팥빙수야
사랑해 사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 마 녹지 마~

*출처: 윤종신 <팥빙수> 中

 

윤종신이 부른 ‘팥빙수’의 후렴구다. 올여름 나는 조선 팰리스의 주방에서 이 구절을 수도 없이 흥얼거렸다.

지난해 우리는, 대한민국 호텔업계의 빙수대전에서 완승하며 ‘빙수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을 쟁취했다. 경쟁사의 망고 빙수에 먼저 붙었던 레토릭을, 샤인머스캣 빙수로 우리가 쟁취한 것이다. 이것을 삼국지스럽게(?) 표현하자면, ‘머스캣언월도’를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단 한칼에 원소의 최고 장수 ‘망고안량’의 수급을 거두어 온 관우의 모습이랄까? 우리 빙수가 ‘빙수계의 에르메스’라면 나는 장 폴 고티에*쯤 되는 것일까?
*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04’~10′)

올여름 나는 주방에서 줄곧 콧노래를 부르며 온갖 생각을 했다. 사실 주방 인력 전체를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본업이 요리사가 아닌가. 주방에 들어가 재료들을 만지는 순간만큼은 이런 유치찬란한 생각들을 통해 기분을 환기했고, 스트레스를 날렸다. 그러다 보니 ‘팥빙수’를 진력이 날만큼이나 많이 불렀다.

입에 너무 오래 달라붙은 멜로디를 좀 바꿔줘야겠다 싶었다. 찾아보니 음식과 관련된 노래가 꽤 있었고, 이 노래들은 ‘푸드송’이라는 장르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뇌를 채워 배를 채워~’하는 후크가 재미있는 윤종신의 ‘뇌를 채워’부터, 그의 ‘영계백숙’, ‘쿠바 샌드위치’, ‘망고 쉐이크’, ‘안녕 핫바’, 여기에 하림의 ‘초콜릿 이야기’, 에디킴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UV의 ‘조개구이’, 박재정 & 마크의 ‘Lemonade Love’, 뮤지의 ‘동그랑땡’, 장재인 ‘밥을 먹어요’까지, 푸드송은 이렇게나 많았다. ‘샐러드 기념일’이라는 곡도 그렇게 찾았다.

…네가 예뻤었다고 했던 조그만 고양이
귀여워서 또 보고 싶어
네가 좋아했던 것들을 나에게 

자그마한 고양이들 방에
한가득하게 채워지네 채워지네 Yeah

나나나나나나
네가 좋아했던 살구빛 샐러드

그 날은 샐러드 기념일 우후 나나나나…

*출처: 허밍어반스테레오 <샐러드 기념일> 中

 

윤은혜와 이동건이 CF에서 불러 더 널리 알려졌지만, 원곡은 허밍어반스테레오가 2005년에 발표했다. ‘샐러드 기념일’이라는 곡명은 타와라 마치의 『サラダ記念日 사라다기념일』(한국어판본의 제목이 『샐러드 기념일』)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 나온 것이다. 1987년 출간된 이 시집에 당시 일본 젊은이들은 열광했고,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 출판역사에서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는 사건이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모두 ‘와카’라는 일본 전통의 정형시다. ‘5.7.5.7.7’ 모두 31개의 음절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계절과 남녀 간의 사랑을 주로 노래한다.

『サラダ記念日(사라다기념일)』에서도 대부분 젊은 여성의 실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서적으로는 다르지만, 형태상으로는 우리의 시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어쩌면 오지 않을 내일이라면/얘기를 다 마치고 잠들려 한다” 시 한 편의 전문(全文)이다. 지극히 짧다. 하지만 많은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또 이런 것도 있다. “지하철 출구에 서서/나를 기다리는 이 없음에…”. 이 짧은 구절 속에 어떻게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지, 읽어도 읽어도 신기하다.

영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시 ‘지하철 역에서’

와카를 맛있게 읽는 요령이 있다. 슬래시( ‘/’ 형태의 문장부호)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었다가, 숨을 한번 쉬고는 뒤를 이어 읽어 보시라. 숨 한번 쉬는 동안, 그리고 시가 끝나는 순간,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나 이야기가 마치 초고속카메라로 찍은 느린 영상처럼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와카를 바로 이 맛에 읽는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문화라고 경계할 것은 없다. 영미권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 일본의 전통시에 열광했고,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대시인도 영어로 와카를 썼다.

와카는 일본에서 시작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문학의 자산이다. 즉 K-POP을 누구라도 부를 수 있듯이,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는 예술적 도구라는 의미다. ‘샐러드 기념일’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잘 음미해보면 찰나를 지극히 함축적인 언어로 포착해 스토리텔링의 단서로써 제공하는 와카의 문학적 요소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사실 주방은 음악적 공간이기도 하다.

탕탕! 탕탕탕! 탕탕탕탕탕! 오늘도 양파 채 써는 소리가 정겹다. 경쾌한 리듬의 도마 위 칼질 소리는 언제나 정신을 맑게 한다. 때로 주방은 백색의 오케스트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마 위의 칼질은 타악기, 달궈진 팬 위의 기름 지글거리는 소리는 현악기, 주방에서 가장 비싼 장비에 속하는 훈연기는 관악기, 부처 주방(어육 주방)에서 대용량 커터믹서기로 고기를 가는 소리는 크고 웅장한 트럼펫, 수많은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마치 피아노처럼 들린다. 새벽마다 이 모든 소리들이 모여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우리 요리사들의 감각을 일깨운다. 음악 속에서 일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일까 나는 때론 하루 내내 속으로 노래한다. 일종의 노동요인 것이다. 아무튼, 당분간 내 입안을 허밍으로 채울 노동요로 ‘샐러드 기념일’을 선정한다는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다. 에즈라 파운드가 영어로 와카 쓴 이야기라니!

해마다 여름에는 서울의 특급 호텔들이 자존심을 건 빙수 대전을 벌인다. 2018년엔 경쟁사의 애플망고빙수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당시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메뉴개발을 맡았던 나로서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절치부심, 내 30년 요리사 인생 모두를 걸고 새 과일 빙수를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수박빙수’다. 우리의 승리였다. 깔끔한 뒷맛과 시원하고 갈증 해소에 탁월하다는 평가 속에서 조선호텔 라운지&바의 시그니처메뉴가 되었다. 수박빙수는 지금까지도 매년 판매 기록을 새로 쓰는 스테디셀러다.

한번 잡은 승기는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조선 팰리스 강남호텔에 와서 나는 아예 빙수에 목숨을 걸었다. 2021년 5월 호텔 오픈 때부터 4가지 빙수를 개발해 메뉴에 넣었다. 봄에는 ‘제주 카라향 빙수’, 여름에는 ‘샤인머스캣 빙수’, 가을에는 ‘홍시 빙수’, 겨울에는 ‘딸기 빙수’를 제공한다. 모든 빙수에 대한 고객들의 평가가 아주 좋다. 특히 샤인머스캣 빙수의 경우 개발 4년 만에 피 튀기는 호텔업계의 빙수 대전에서 ‘빙수계의 에르메스’라는 영광의 레토릭을 쟁취하며 최고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이럴 때 느끼는 기분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문을 지나는 로마의 장군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올여름 내내 흥얼거렸던 노래 ‘팥빙수’는, 나의 노동요면서 동시에 승전가이기도 했다. ‘샐러드 기념일’이 부디 나의 새 승전가가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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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