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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요리사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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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요리사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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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다. 한해의 딱 절반을 보냈다. 나머지 절반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마음먹는다. 다가올 한여름의 폭염을 내 뜨거운 열정이라 여겨본다.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더위조차 내 것이니 말이다.

나는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의 식당들을 책임지고 있는 총주방장(Executive Chef)이다. 나의 하루는 새벽에 입고된 식재료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날 각 주방에서 주문한 과일, 채소, 생선, 육류, 기타 공산품들이 도착해 순서대로 검품을 받고, 냉동실과 냉장실, 드라이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달까?

식재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든든함이랄까? 뿌듯함이랄까? 감사함이랄까?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아무튼, 좋은 기분이다. 가끔 급하게 식재료를 요청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시간에 늦지 않게 가져다줄 때면 구매 담당자들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모른다. 그들은 평범한 회사원 같은 모습이지만, 내 눈에는 모두 슈퍼 히어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날만 있는 건 아니다. 장마철엔 식재료들의 상태가 최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답답하다. 특히 과일은 일조량도 많고, 기온이 높아야 당도가 제대로 올라오는데, 흐린 날씨가 이어지면 과일의 당도가 기준에 못 미치고, 그래서 결국 반품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정말이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장마철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일기예보부터 검색한다. 이렇게 이제 막 다가온 여름에 대응하면서도, 머리로는 벌써 가을맞이를 시작해야 한다. 계절을 앞서 미리 준비해야만 하는 패션 디자이너처럼 우리도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의 메뉴를 미리 구상해야 한다. 그래서 호텔의 주방은 늘 바쁘다. 손님이 많을 때도 바쁘지만, 손님이 없는 시간에도 바쁜 거다.

바쁘긴 해도 새 메뉴를 개발하는 일은 재미가 있다. 똑같은 요리를 반복해서 만들다 보면 머리 없이 손만으로도 만들 수 있게 된다. 마치 기계처럼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다시 머리가 가동된다. 자료들을 찾고, 만들어 보고, 맛을 찾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식재료도 발굴해야 한다. 힘들지만 새로운 요리를 만든다는 것은 요리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패션 디자이너나 우리 요리사들은 이렇게 자신의 피부로는 체감하지 못하는 계절과 온도와 풍경 등등을 상상하며 일을 해야 한다.

바로 그래서 기본이 중요하다. 감각이 알아서 챙겨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새 메뉴를 개발하는 시기 동안 혼자 묻고 대답하는 일을 무한 반복한다. “이것을 왜 해야 하지?” “응!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끔은 자신에게 욕도 한다. “바보야! 이런 기본도 까먹냐? 너 요리사 맞냐?” 30년이 넘게 주방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호텔 주방의 한구석에서 한창 일을 배울 무렵에만 해도 나는 내 아이들이 요리사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일보다는 쉬운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청춘을 바쳐 땀 흘리고 있는 후배 요리사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했다. 우선 ‘내 자식에게도 시키지 않겠다는 일을 남의 집 귀한 자식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요리사만큼 도덕적인 직업도 없잖아? 늘 다른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사는 거니까…’라는 생각도 든다.

 

요리사는 불 앞에 서서 일하는 직업이라 더운 여름이 제일 힘들다. 더운 여름날 불 앞에 서서 스테이크를 굽거나 프라이팬으로 채소를 볶다 보면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가 다시 마르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업무를 마친 후 샤워를 하기 위해 벗은 유니폼 바지를 보면 엉덩이 부분에 흰 줄무늬가 여러 개 생긴 걸 볼 수 있다. 땀이 만든 소금 자국이다. 그럼 난 줄무늬 개수를 세어보고 난 그날의 업무 강도를 나름대로 평가하곤 했다. 그 시절엔 덥지 않은 비 오는 날씨를 더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채소와 과일의 품질만 생각하면 이젠 여름은 자연의 순리대로 더워야 맞지 싶다.

음식을 하는 요리사에게 좋은 식재료에 대한 욕심은 본능과 같은 것이다. 좋은 식재료는 그 자체로 요리사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적정한 재료비까지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늘 생각했다.

 

올해도 구매 총무 담당자와 자주 회의를 했다. 그러다 나온 아이디어가 요리사와 구매 담당자가 함께 직접 산지를 찾아가 식재료를 구매해 보자는 것이었다. 호텔처럼 식당의 규모가 거대하면 식재료 구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고급’이나, ‘최고급’을 넘어서는 ‘하이앤드급’의 요리를 만들기엔 오히려 호텔의 편리한 구매 시스템을 벗어나 작은 노포 식당처럼 식재료를 구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그래서 올해는 1월부터 6월까지 구매 담당자, 주방장들과 전국을 다녔다. 남쪽 제주도를 시작으로 부산, 천안, 예산, 철원의 민통선까지 수산물, 과일, 각 지역의 특산품들을 찾아다녔다. 빠듯한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고 졸음이 몰려올 때는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할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발로 뛰며 함께 구한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을 기분 좋게 드시는 고객들을 떠올리니 기운이 났다.

 

천안에서 우연히 만난 이00 배 농장 대표는 ‘배’의 육종과 재배, 저장 기술 등을 연구한 농학박사 출신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가을장마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배 산업 발전을 위해 그는 진작부터 새로운 조생종 품종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러다 신고배의 안정적 재배와 맛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그는 2018년부터는 아예 귀농하여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가 자신이 수확한 배의 맛을 보라며 조심스럽게 내미는 그의 손을 보며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다. 진정성으로 통하는, 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그 손에 있었다. 이런 정도의 정성과 상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의 배를 맛보며, 이 훌륭한 식재료를 가지고 우리 호텔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어떤 상품을 개발할지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옛말에 천우자조자(天佑自助者)라고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식재료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며 스스로를 열심히 도와야겠다. 그런데 이거 너무 재미있다. 훌륭한 식재료에는 맛 외에도 누군가의 인생과 철학이 이야기처럼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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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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