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다시 주목받는 신사임당, 오해와 진실

2017/05/12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뛰어난 그림들을 남긴 화가. 사임당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사임당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사임당에 관한 책 두 권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드라마 방영에 맞춘 마케팅? 글쎄요.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도 좀 느닷없기는 합니다. 더구나 드라마도 예상과 달리 큰 관심을 못 받았으니 말이에요.

사임당이 우리 안의 사임당, 우리 곁의 사임당이 된 건 바로 오만 원권 지폐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지요. 왜 사임당이지? 우리 역사를 빛낸 위인들은 많은데 어째서 사임당일까? 당시 언론 보도를 찾아보니 한국은행의 선정 이유는 “여성·문화 예술인으로서 대표적 상징성이 있다” 였습니다. 이 결정으로 사임당은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공인’을 받게 됩니다. 오천 원권 지폐에 새겨진 아들 율곡 이이와 함께 모자가 동시에 지폐에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기록까지 남기면서요.

<수묵포도>,  비단에 수묵,  31.5×21.7cm(그림 크기),  간송미술관 소장

지폐 얘기가 나왔으니 사임당의 그림부터 살펴볼까요. 오만 원권 지폐의 앞면을 수놓은 포도 그림이 보이시지요?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포도 알이 익은 정도에 따라 먹의 묽기를 달리해서 생동감을 기가 막히게 살렸지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옛 그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가의 낙관이 없습니다. 글씨도 없고요.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사임당의 그림인지 아닌지 판별하기가 훨씬 쉬웠을 거예요.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 여성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림이나 글씨에 자기 도장을 찍는다는 건 더더군다나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거고요.

오늘날 사임당이 그렸다는 그 많은 그림은 ‘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전칭(傳稱) 작입니다. 그래서 사임당이란 화가 이름 앞에 전(傳)이란 말을 붙여 흔히 ‘전(傳) 신사임당’이라고 표기를 하는 거지요. 다만 사임당의 작품이라고 볼 근거가 남아 있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위의 포도 그림은 조선 후기 최고의 그림 수집가였던 석농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란 분이 펴낸 전설적인 그림 모음집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수묵포도(水墨葡萄)’란 제목으로 수록돼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장가 동계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이 쓴 다음과 같은 글까지 붙어 있습니다.

*전칭(傳稱) : 전하여 일컬음

이 정도로 단단히 못을 박은 걸 보면 그림이 진품이라는 걸 힘주어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임당의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사임당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 무게중심을 두면 우리 회화사의 커다란 알맹이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지요. 오죽했으면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백인산 선생조차 자신의 책 <간송미술 36: 회화>의 첫머리에 사임당의 포도 그림을 소개하면서 글의 대부분을 이런 곤란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을까요.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이 <포도> 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는 3백 년 전문인들의 말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수 초충도 병풍>,  1540년경,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포도 그림 뒤로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 한 점 더 있습니다. 잘 익은 가지 세 개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이 작품은 먹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완성한 자수(刺繡)인데요. 줄기며 잎이며 꽃이며 벌이며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동감 있는 묘사가 일품이지요. 게다가 색채의 사용을 보면 수백 년 전 작품이 맞나 싶게 현대적인 감각까지 엿보입니다. 그래서 이 가지가 포함된 여덟 폭짜리 <자수 초충도 병풍>은 보물 제595호로 지정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사임당의 그림들이 실은 바로 이 자수를 위한 밑그림이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풀과 벌레가 어우러진 사임당의 그림들은 소재도 그렇고 표현법도 그렇고 자수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임당은 생전에 풀과 벌레를 즐겨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초충도(草蟲圖)라고 하는데요. 사임당이 우리 회화사에서 초충도의 선구자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사임당에게서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도드라집니다.

(좌) 초충도 8폭 병풍 중 제6폭 ‘양귀비와 풀거미’,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우) 겸재 정선,  <홍료추선(붉은 여뀌와 가을매미)>,  20.8×30.5cm, 1742년,  간송미술관 소장

사임당 그림에서 양귀비 풀은 화면 한가운데 서 있지요. 하지만 겸재의 그림을 보면 화면 한쪽에서 풀이 돋아 나오고 있고요. 다시 말해 사임당의 그림에선 주인공인 식물이, 그것도 한 포기만 커다랗게 화면 가운데에 배치되는 중앙 집중식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겸재의 그림에서 보듯이 당시 화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거든요. 게다가 사임당의 작품은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이고 자연스럽기보다는 장식적인 면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초충도는 그림 자체를 위한 거라기보다는 자수를 위한 밑그림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히려 사임당의 초충도는 전에 없던 독창성을 띠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임당은 정말 복이 많은(?) 화가입니다. 본인의 얼굴이 들어간 최고액권 지폐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아들 율곡 이이가 등장하는 오천 원권 지폐에도 두 점씩이나 작품이 실렸으니 말이에요. 오천 원 지폐 뒷면을 보면 좌우로 그림 두 점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요. 위에 소개해 드린 ‘양귀비와 풀거미’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돼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초충도 8폭 병풍 가운데 셋째와 다섯째 그림입니다.

<초충도 병풍>,  48.6×35.9cm,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호,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왼쪽에 짙은 색으로 인쇄된 그림은 수박을, 오른쪽에서 희미하게 뒤를 받치는 그림은 맨드라미를 묘사했습니다. 특유의 온화하고 섬세한 묘사가 고운 색채와 어우러져 역시 사임당이야 하는 감탄을 자아내지요.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 1648~1736)도 병풍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임당의 작품에 대해선 후대에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상기(宋相琦, 1657∼1723)는 지금은 어디에 소장됐는지 확인되지 않는 사임당의 7폭 병풍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을 한여름에 볕을 쬐어주려고 마당 가운데 내다 놓았더니 닭이 쪼아 종이가 뚫렸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후대에도 심심찮게 구전된 건 바로 이 글귀 때문이지요.

다시 진짜, 가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사임당의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란은 당연히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얘기입니다. 최근 <신사임당>이란 책을 낸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친절하게 정리한 내용을 보면, 진짜라고 볼만한 요건은 크게 네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사임당이 살았던 강릉에 있었거나 둘째, 사임당 후손의 집에서 나왔거나 셋째, 당대의 유명 인사가 소장했거나 넷째, 작품의 유통 경로가 자세하게 밝혀졌다면 진품일 가능성이 큰 걸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역시 판단은 쉽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나 문인이 쓴 품평이 붙어 있다고 해서 사임당의 진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울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 <사임당, 그녀의 화원>를 통해 최근 새롭게 공개된 ‘묵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아래 그림입니다.

<묵란도>,  연도 미상, 비단에 수묵, 92.5×45cm,  서울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2005년에 KBS의 <tv쇼 진품명품=””>에 처음 공개된 이후에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 구매하기 위해 소장자를 1년 반 동안 설득해서 <진품명품> 감정가의 배 이상을 주고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지요. 먹으로만 그렸다는 사실만 다를 뿐 앞서 보신 것처럼 식물 한 포기를 화면 가운데 배치한 사임당 초충도의 전형적인 중앙 집중식 구도를 보여줍니다. 그림 위에 붙은 글은 어떤 내용일까요. 글쓴이는 바로 율곡 이이의 제자인 당대 최고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입니다. 첫 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고 중찬성 이 공(이원수)부인 신(申) 씨의 작품이다.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이 이렇거늘 하물며 오행(五行)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근본 되는 기운의 융화를 모아 참 조화를 이룸 이겠느냐.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사임당의 뛰어난 재주를 높이 평가한 대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송시열은 그 뒤에다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라는 평을 붙입니다. 순수한 작품 평가를 넘어서는 내용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만일 이 그림이 다행히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이 그림첩 아래 붙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인의 어머니 된 것과 선생(율곡)의 아들 된 것이 진실로 근본과 가지가 서로 전승함임을 알게 하여 저
상곡군(上谷君, 정자(程子)의 어머니 후부인) 집안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이야기를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백종은 그 소홀히 하지 말진저!”

강릉 오죽헌과 신사임당 동상

16세기까지만 해도 어엿한 화가 대접을 받았던 사임당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율곡의 어머니’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화가로서의 사임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율곡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된 겁니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사임당 신화 만들기 프로젝트였다고 할까요. 그 뒤로 일제강점기에도 사임당을 추켜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임당은 일본에서 수입된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활용됐지요.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영웅을 추켜세우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는데요. 그때도 사임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합니다.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역사를 근대의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현신으로 비유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자애로운 모성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오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사임당을 선정했을 때 여성계가 강하게 반발한 것도 사임당이 수백 년 세월 동안 이런 왜곡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최근 석 달 간격을 두고 <사임당전>과 <신사임당> 두 책이 잇따라 출간된 것도 흥미롭지만, 저자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관점의 차이가 확연한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임당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다른 책들을 펼쳐보아도 그런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거든요.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사임당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작품’에 집중할 일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사임당의 것으로 전하는 작품이 여러 점 소장돼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사임당 초충도의 백미라 할 초충도 8폭 병풍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 명품입니다.

<초충도 8폭 병풍>,  16세기 초, 종이에 채색,  각 폭 34.0×28.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덟 폭짜리 병풍의 셋째인 ‘수박과 여치’, 넷째 그림인 ‘가지와 범의 땅개’입니다. 조선 중기의 그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격조 높은 색의 구사가 일품이지요. 풀과 벌레의 섬세한 묘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당대에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묘사력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임당의 기량이 마음껏 펼쳐진 걸작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연구자들이 사임당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이 바로 이 병풍 그림입니다. 더구나 이 병풍은 197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증한 작품이기도 해서 더 흥미를 자아내지요.

흔히 사임당 하면 포도 그림이나 초충도를 떠올리는데요. 그런데 사임당은 생전에 이미 산수화가로 꽤 이름을 날린 화가였습니다. <패관잡기>라는 책을 쓴 16세기 문인 어숙권(魚叔權)은 “근래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매우 많지만, 산수화에는 김장(金璋)과 이원수의 아내 신 씨와 학생 안찬(安瓚)이 있다.”라며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었고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란 분은 “저녁에 목사 노인보, 판관 김난종이 함께 보러 와 죽청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원수도 왔는데, 이전의 이름은 난수(蘭秀)로 산수화를 잘 그린 신 씨의 남편이다.”라고 했습니다.

(좌) 맹호연 시 산수도,  전 신사임당,  종이에 담채,  34.2×62.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백 시 산수도,  전 신사임당,  종이에 담채,  34.8×63.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임당의 것으로 전하는 산수화입니다. 두 작품 모두 물가 풍경을 그렸는데요. 왼쪽 그림에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가, 오른쪽 그림에는 역시 당나라 시인이었던 이백(李白)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임당의 것이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습니다. 사임당의 그림을 논할 때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이 그림도 비껴갈 수 없는 겁니다. 때문에 사임당의 작품이 과연 몇 점이냐 하는 것도 매번 혼란을 부릅니다. 10여 점 남짓이라는 극히 보수적인 주장부터 자그마치 80여 점에 이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4남 3녀를 낳고 48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짧은 삶의 시간 동안 온갖 다사다난함 속에서 그토록 눈부신 예술을 꽃피웠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위와 옥석이 가려져야 한다는 점을 숙명처럼 떠안고 있지요. 아들 율곡이 16세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쓴 ‘선비행장(先妣行狀)’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 찬찬히 읽어봅니다. 아들의 뜨거운 문장 속에서 사임당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뛰어난 화가였으니까요.

“자당은 평소에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