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추억의 ‘플란다스의 개’와 위대한 ‘루벤스’ 이야기

2018/10/02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의 작은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지요. 소년과 할아버지는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온종일 굶는 날도 많았거든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웃집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작은 수레에 싣고 가까운 도시로 배달하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에겐 수레를 끄는 일조차 버거웠답니다. 그래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마을에서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던 날이었어요. 웃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 사이를 할아버지는 힘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풀숲에 쓰러진 커다란 개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 옆에는 작은 금발 머리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서 있었고요. 할아버지는 개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보살핍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개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소년의 둘도 없는 가족이 됩니다.


1975년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플란다스의 개>는 국내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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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위대한 화가를 꿈꾸다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 따뜻한 동화를 말이에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은 그래 그거야 하실 겁니다. 저 역시 아주 어렴풋하게 본 기억은 있지만,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뭔지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까맣게 잊고 말았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서야 문득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어지더군요. 넬로와 파트라슈의 따스한 우정을 담은 동화 <플란다스의 개>를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실 소년에겐 아주 큰 꿈이 있었습니다. 루벤스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루벤스가 누구냐고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술의 역사에서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고향은 플랑드르 지방입니다. 지금의 벨기에에 속한 지역이지요. 동화의 주인공 넬로가 사는 곳이 바로 이 플랑드르입니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자랑이었어요. 넬로는 그런 루벤스를 한없이 동경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루벤스처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넬로는 그런 간절한 꿈을 무럭무럭 키워갑니다.

‘루벤스의 도시’ 안트베르펜에는 루벤스가 살던 집이 있고 죽은 뒤에 잠든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에는 루벤스가 남긴 거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지요. 소년은 그 그림들을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천이 그림을 가리고 있었거든요. 우유를 배달하러 갈 때마다 넬로는 어김없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요.

 

“가난해서 돈을 못 낸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볼 수 없다니 정말 너무해! 그분은 분명 가난한 사람들은
못 보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저 그림들을 그리진 않았을 거야.
우리가 언제라도 매일 그림을 보길 바랐을 거라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그림을 천으로 덮어
어둠 속에 가둬 놓고 있어! 부자가 와서 돈을 내지 않으면
빛도 들지 않고 아무도 못 보게 말이야.
난 저 그림들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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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신, ‘루벤스’를 만나다

넬로에게 루벤스는 ‘신’이었습니다. 소년은 천국 같은 꿈에 빠져들었지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소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소년은 그림을 그립니다. 물감을 살 돈이 없었기에 돌 위에 석필로 그림을 그렸지요. 소나무 널빤지에 숯으로도 그렸고요.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넬로에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티 없이 해맑고 착한 소년에게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기만 합니다. 가난한 것도 모자라 화가가 되겠다고 하느냐며 둘도 없는 친구 알루아의 아버지는 둘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습니다. 심지어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방화범으로 몰리자 마을 사람들은 등을 돌려 버리지요.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아버지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를 못 이기고 결국 넬로만 남겨둔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 끝내 정든 오두막을 떠나야 하는 넬로와 파트라슈의 가련한 운명이란…. 한겨울 추위 속에서 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루벤스의 그림이 걸려 있는 성당이었어요. 문이 열린 성당 안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자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루벤스의 그림이 마침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슬픈 동화는 소년의 꿈이 이뤄지는 이 극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넬로가 일어서더니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기쁨에 찬 눈물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둘은 죽음을 맞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죽은 넬로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있었지요. 저 나이 어린 소년이 목숨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그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기엔 너무나도 가슴 시린 이야기입니다. 저 착하고 순수한 영혼들을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작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죽는 순간에도 넬로를 미소 짓게 만든 루벤스의 그림은 대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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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루벤스의 집’

‘루벤스의 도시’라 불리는 안트베르펜은 사실 루벤스의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곳은 안트베르펜이 아니라 독일의 지겐이었지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독일로 이주해 살던 루벤스 가족이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 것은 루벤스가 12살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낸 루벤스는 스물한 살 나이에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1600년,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루벤스는 그리스와 로마, 르네상스의 위대한 유산을 통해 화가로서의 자질을 탄탄하게 다집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길에 오른 루벤스는 이후 안트베르펜에 정착합니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귀국한 지 1년 만에 당시 남부 네덜란드를 다스리고 있던 알브레흐트 대공 부부의 궁정화가로 임명됐지요. 루벤스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당시는 전통적인 가톨릭 구교와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신교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무척이나 심했어요. 성상 파괴 운동이란 것이 벌어져 가톨릭 성당치고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성당을 재건해야 했을 때 루벤스는 그림 주문을 받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제단화가 성당에 걸리자 루벤스는 단숨에 플랑드르 지방 최고의 화가로 찬사를 받게 되지요. 안트베르펜의 성모 성당에는 루벤스의 제단화 세 폭이 남아 전하는데요.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입니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좌)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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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로,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다

거룩하고 신성한 성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려진 거대한 그림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요. 단순히 그림 자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영적 감동이 보는 이를 가슴 떨리게 하고 눈물짓게 하지 않았을까요. 감히 그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한 번이라도 그림을 본 이들은 그 주체하기 힘든 감동에 벅차올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루벤스 그림 봤어? 봤냐고?

그림의 명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을 겁니다. 어린 넬로도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위대한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요. 그림 한 점을 본다는 것이 목숨과 맞바꿀 만한 것이었을까. 한낱 동화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슴 시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요. 다시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을 펼쳐 봅니다. 넬로가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지요.

 

“거기 가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거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