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최고의 호텔다운 요리 철학이 필요하다

얼마 만의 미국 출장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코로나로 막히기도 했지만 이후엔 조선 팰리스의 일이 너무 바빴다. 출장을 앞두고 살짝 걱정이 되었다. 출장지인 뉴욕과 보스턴의 레스토랑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만약 그 간극이 크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온전히 담아올 수 있을까? 수없이 인터넷을 뒤지고 현지인들을 취재하며 출장 계획을 짰다. 요리사의 출장 목적은 사실 별것 없다. 현재 그곳의 가장 핫하고 트랜디한 요리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떤 레스토랑에서 어떤 방식으로 서비스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방문할 레스토랑을 선정하면, 위치를 파악해 놓고 시간대별로 나누어 동선을 정리한다. 메뉴 개발을 위한 요리사의 해외 출장은 한마디로 시간과의 싸움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레스토랑 방문 스케줄이 촘촘할수록 더 많은 것을 먹어볼 수 있고, 그 요리를 만든 셰프의 의도한 바를 느끼고, 공감하면서 내 미각세포에 저장하고 머릿속에 정리한다. 그러면 메뉴를 개발할 때 모티브로 작동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오랜만에 가는 출장이니 가능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한가한 여행자처럼 세끼만 먹어선 안 된다. 하루에 무려 6끼를 먹었던 적도 있다. 게다가 한 레스토랑에서 하나의 메뉴만 맛보고 나올 수는 없다. 눈에 띄는 요리들을 죄다 주문해야 한다. 진짜 문제는 배가 부르면 미각이 둔해진다는 것이다. 그만 먹으라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러면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컨디션이다. 뉴욕까지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과 낮과 밤이 바뀌는 시차를 극복해야만 한다. 현지 도착과 동시에 시작되는 요리사의 출장 업무는 그래서 늘 긴장된다. 유서 깊은 도시 뉴욕과 보스턴, 거기서도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과 베이커리에 들어가 최고의 음식들을 맛보는 출장. 겉만 보면 마치 황제의 여행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하루 최소 4~5번의 식사를 하며 진행하는 디저트와 빵 테이스팅은 정말 고된 노동이다.

도착한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입국장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입국심사 대기가 엄청나다. 지루한 줄서기부터 변한 것이 없다. 인천공항의 신속한 입국이 떠올랐다. 벌써부터 한국이 그리웠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를 조롱하는 외국인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한국인도 있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기어이 최적의 효율을 찾아낸다. 호기심과 집념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창의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5천 년이 넘도록 우리나라를 지켜내지 않았을까? 물론 인과관계가 반대일 수도 있겠다. 적은 인구로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의 영토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그런 강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빨리빨리’는 자조보단 자부심을 가질만한 문화인 것 같다. 뭐든지 가장 신속하게 처리하고 완성해 내는 사람들! 꽤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입국심사대까지 가는 동안 내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떠올린 생각이다.

미국 맨해튼 전경

공항에서 호텔로 가려고 보니 길에 옐로우캡이 안 보인다. 물어보니 요즘 뉴욕에선 거의 다 우버택시를 부른다고 했다. 잽싸게 폰에 앱을 깔고 결제 카드 등록 후 우버 앱 목적지에 투숙할 호텔명을 등록했다. 한국의 카카오 택시처럼 기사 차량번호와 기사 이름이 바로 폰에 뜬다. 효율적인 택시 시스템을 보며 미국도 한국과 비슷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너머로 뉴욕의 빌딩들이 보이자 그제야 맨해튼에 온 것이 실감 났다. 호텔 위치는 센트럴파크 남쪽이었고 바로 앞이 공원이다. 가야 하는 레스토랑들이 호텔과 멀지 않아 대부분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뉴욕의 거리는 여전했다. 전 세계 모든 유행을 리드하는 도시답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거리는 붐볐다. 귀청을 찢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는 내가 뉴욕이라는 도시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출장 중 방문했던 맨해튼의 식당들은 언제나 매끄러운 테이블매너와 세련된 서비스로 편안함을 주었고, 화려하고 풍성한 음식들은 오감을 즐겁게 해 주었다. 왜 그들이 미쉐린의 별인지를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출장에서 스스로에게 놀랐던 것이 있다. 맨해튼의 화려하고, 세련된 요리들이 나를 크게 자극하거나 영감을 주지는 못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변화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궁금했다. 이젠 한국의 레스토랑들이 맨해튼보다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고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찜찜했다. 그 이유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맨해튼이 시시하게 느껴진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뉴욕에 머무는 내내 그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음 행선지인 보스턴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올드머니(Old money)는 특정 가문이나 가계에서 오랜 기간 축적된 부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주로 미국에서 사용되는데, 뉴잉글랜드 지역의 성립 초기, 특히 18세기 이후부터 유럽에서 이주한 부유한 영국 귀족 가문의 재산을 가리켰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랜 세월 동안 부와 권력을 지닌 가문, 혹은 그런 가문에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활용된다. 이들은 부유하지만 오히려 규율적이고 절제된 소비와 생활 방식이라 스타일상으로는 소박해 보인다. 이에 대비되는 뉴머니(New money)라는 단어도 있다. 이는 원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미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으로 등장한 새로운 부유 계층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업 성공, 투자 수익 등을 통해 신흥 부자가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을 상징하는 스타일은 과시적인 소비와 성급한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비롯한 단어인 올드머니와 뉴머니는, 오늘날 부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를 구분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올드머니는 ‘전통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태도’에, 뉴머니는 ‘새로운 도전과 성공을 강조하는 태도’에 사용된다.

화려하고 세련된 뉴욕의 최고급 레스토랑 요리들이 뉴머니 스타일이라면 보스턴의 소박하고 내추럴한 음식들은 올드머니 스타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호텔에서만 요리한 나의 눈엔 언제나 뉴욕의 요리들이 가장 멋지게 보였다. 그런데 변했다. 뉴욕과 보스턴의 레스토랑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변한 것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의 요리를 만든다. 요리의 세계에서 최고는 단 하나일 수가 없다. 요리는 올림픽이 아니니까. 그래서 요리사가 꼽는 ‘최고의 요리’는 그의 철학이다. 최고, 혹은 최고 중의 최고를 무엇으로 결정하느냐는 그것을 정하는 그 사람만의 가치 기준이고 세계관이니까 말이다. 이번 출장길 보스턴에서 찾아낸 Tatte Bakery & Cafe에서 나는 궁극의 편안함과 진정한 맛을 느꼈다. 내가 추구하는 요리의 본질이 바로 이런 올드머니 스타일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웨스틴 조선 서울

우리 조선호텔은 올해로 110주년을 맞이한다. 대한민국 호텔 중에 최고(最古)의 역사다. 이 역사를 책임지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특급 호텔들에 비해 잘하는 요리, 화려하고 럭셔리한 요리 정도로는 부족하다. 5천 년 유구한 전통을 가진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호텔다운 요리 철학이 필요하다. 맛 이상의 품위를 찾으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우리 패션계에서 올드머니 스타일이 핫 트렌드로 등장했다니 무척 반갑다. 나는 당장 올드머니 스타일을 요리로 해석해 보려고 한다. 맛이 멋을 넘어, ‘사상’이 되고, ‘시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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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