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집, 보이지 않는 밥

백희성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어떤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였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던 중 나무 바닥에서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바닥을 얼른 고쳐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절대로 안 된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생전 이 의자에 앉아 창가의 햇볕을 벗 삼아 책을 읽었어요. 그 오랜 시간 의자를 뒤로 젖히는 버릇 때문에 바닥이 상해서 소리가 나게 된 거예요. 지금은 그이가 없지만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영혼이 아직 이 집에 같이 숨 쉬고 있음을 느껴요……”

백희성은 건축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웠다. 오래되고 부서져 나는 소리를 통해, 비로소 그 집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의 책 『보이지 않는 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자르고 익히고 접시에 담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잘라 입에 넣은 후 씹고 목으로 넘기는 과정, 즉 음미를 통해 요리는 완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백희성이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은 내가 요리에 대해 가진 생각과 데칼코마니처럼 일치했다.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 고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티뷰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 호텔은 시티뷰로 유명하다. 위치가 서울 강남의 한복판인 역삼동이다 보니, 문화유적지인 선릉, 매봉산과 타워팰리스… 날씨가 좋으면 한강 건너 남산타워도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일하는 직장에서 매일 이런 풍경을 만나는 것은 분명 내 인생의 큰 행운이다.

지난 1월 어느 날이었다. 기다리던 지하 2층의 구매 검수 BOH* 공사가 끝났다. 효율적인 공간 재설계로 식음료의 재료 순환이 훨씬 편리해졌다. 이용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밝아졌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의 기분도 아주 흐뭇했다. 그런 기분 탓일까. 그날따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비추는 햇살마저 더없이 밝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행복했다. 넓디넓은 호텔에서 그 작은 공간 하나가 개선됐을 뿐인데, 그게 사람을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다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머물고 움직이는 ‘공간’이 가진 영향력은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이었다. 스타 건축가 백희성과의 만남이 예정에도 없이 이루어졌다.

*BOH(Back of House): 드라이 창고 및 워킹 냉동 냉장고

점심 영업을 마치고 주방장들과 메뉴 미팅을 끝내자마자 출판평론가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중요한 인물과의 저녁 약속을 조선 팰리스 1914 라운지로 잡았는데, 그 사람이 『독서주방』을 읽었고 유 셰프 팬이다. 자네 호텔 근무가 끝나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데, 합석해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가 건축가 백희성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의 첫 책 『환상적 생각』을 읽었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책으로 먼저 만났던 그는 천재적인 건축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과 태도가 좋은 사람이었다. 나보다 10살쯤 젊었지만, 10년 선배처럼 존경스러웠다. 저녁이 되자 그가 왔고, 우린 각자 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한 후 서로에게 선사했다.

백희성의 두 번째 저서 『보이지 않는 집』의 새하얀 표지에는 제목도 저자명도 새겨지지 않았다.

그날 그가 나에게 선물한 책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보이지 않는 집』이었다. ‘어라! 이 책 왜 이래?’ 책의 물성이 선사하는 느낌이 좀 달랐다. 표지에 특수한 종이를 사용했는지 마치 부드러운 가죽과도 같은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새하얀 표지에는 제목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대신 표지 한가운데 오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거기에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는 검은 도안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펴보니, 이 책은 ‘책’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여겨져 온 많은 요소를 배제하고 있었다. 제목도 저자명도 새겨지지 않은 표지라니 말이다. 그날 그와의 대화는 더없이 즐거웠다. 건축과 요리 사이에 유사한 점이 그토록 많을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건축가 백희성은 2010년 프랑스 그랑제콜 건축학교에서 최우수 졸업 작품 제작자에게 수여하는 ‘폴 메이몽 건축가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세계적인 건축 아티스트다. 그는 8년간 파리에 거주하며 기품 있고 잘 지어진 오래된 저택에 호기심을 품었다고 한다. 무심히 길 가다가도 그런 저택과 마주치면 무작정 우편함에 편지를 써서 넣었다. ‘당신의 집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축가로부터’ 놀랍게도 회신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방문을 허락하면 백희성은 주인을 만나 집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단다.

‘마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그 집의 요소’라는 이야기를 들려준 파리의 그 할머니도 방문 허락을 회신한 주인 중 한 분이었다. 그는 당시 그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충격적인 깨달음과 ‘계시’라고 표현해도 될만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거기에 사는 사람이 부족함을 추억과 사랑으로 채우는데, 이때야 비로소 ‘건축이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이 깨달음 후에 백희성은 고객들이 의뢰한 집이나 건축물에 그들이 가진 기억의 요소들을 넣어 감동을 선사한다고 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말에 100% 공감했다.

나는 요리사지만, 나는 결코 요리를 완성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요리를 만들기까지만 한다. 이후는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앉은 고객의 몫이다. 그들에게 남겨질 그날 그 식사의 기억이야말로 내 요리의 진정한 완성이리라.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믿어왔다. 국내 최고(高)이자 최고(古)인 조선호텔 100년의 역사를 담은 조선 팰리스가 내어놓는 요리라면, 이 정도의 철학은 가지고 있어야 어울릴 것이라고 또한 나는 믿는다.

그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집’을 짓고,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밥’을 짓는다. 집과 밥, 이 둘의 보이지 않는 면에 우리 둘은 똑같이 생각과 마음을 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집도 밥도 모두 ‘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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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