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 (3)

2017/11/27

꽃담과 굴뚝에 새겨 넣은 만수무강의 염원

경회루를 찍고 아미산을 지나 그저 물 흐르듯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또 하나의 보물이 바로 자경전(慈慶殿) 꽃담입니다. 자경전은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대비에게 보답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88년에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건물이라고 하지요. 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자경전 바깥의 서쪽 담장에 갖가지 꽃을 그려 넣었습니다. 담장 위에 펼쳐진 야외 꽃그림 전시회라고 할까요. 벽돌이 그려내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예쁜 꽃이 기가 막히게 어울려 있습니다. 호젓한 궁궐 산책길에 이만한 호사가 없었겠지요.

꽃담을 따라 걸으며 잠시 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갖고 난 뒤 이제 자경전 후원으로 향합니다. 이곳에도 아주 귀한 보물이 있습니다.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자경전 역시 대비가 잠을 자는 공간이었으니 당연히 굴뚝이 있는데요. 교태전 후원 굴뚝과 달리 자경전 굴뚝은 외벽 북쪽에 덧집처럼 붙어 있습니다. 언뜻 봐선 이게 굴뚝인가 싶지만 기와지붕 위에 연가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게 보이시지요? 아궁이 숫자에 맞춰 모두 10개가 가지런하게 앉아 있네요. 꼭 전선 위의 참새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이 독특한 형식의 굴뚝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에 걸맞은 다채로운 무늬들입니다.

외벽의 중앙에는 가로로 긴 화면에 갖가지 자세와 모양을 한 십장생(十長生) 벽화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위와 아래, 양쪽 옆면에는 험상궂은 얼굴의 나티(짐승 모양을 한 귀신)와 박쥐, 학 등이 십장생을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오래 사시라는 염원을 담은 형상들이지요. 조선시대 궁궐 굴뚝의 대표 선수로 평가돼 굴뚝만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에요. 귀한 유물인 만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궁궐 안임에도 이례적으로 덧집까지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래서인지 경복궁에 가면 일부러라도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자경전을 지키는 해태상의 비밀

이렇게 귀한 보물들이 격을 높여준 덕분에 자경전은 건물 자체도 따로 보물 제809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뒤를 보았으니 이번엔 앞을 봐야지요. 그런데 이게 뭔가요. 건물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더니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땐 잘 보이지 않던 돌조각 하나가 서 있군요. 생김새로 보아서는 영락없는 해태상입니다. 광화문 바깥으로 양옆에 떡 하니 앉아 있는 바로 그 해태상의 축소판이에요. 궁궐 건물 앞에 짐승의 돌조각을 세워둔 건 처음 봅니다. 물론 전례가 없다고 해서 꼭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요. 아무튼 워낙 드문 경우라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해태라고 부르는 이 정체 모를 짐승은 예로부터 불을 막아주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상징이었답니다. 한자 이름은 해치(獬豸)입니다. 광화문 앞에 두 마리가 좌우로 짝을 지어 서 있으니 우리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존재이지요. 선과 악을 가려낼 줄 안다는 상징성 덕분에 국회의사당과 검찰청사 앞에도 서 있습니다. 자경전 앞에 수호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해석하면 될 겁니다. 문제는 이 해치상이 과연 언제 자경전 앞에 세워졌느냐 하는 점이에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른 해치상이 만들어진 시기로 유추를 해볼 순 있겠지요.

(좌) 광화문 좌측 해치상
(우) 광화문 우측 해치상

광화문 앞 해치는 1864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해치상이 또 있어요. 경복궁 동남쪽 끝에 외로운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을 기억하시나요? 동십자각(東十字閣)이란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궁궐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근무하던 망루입니다. 역시 경복궁 중건 때 지어졌고요. 이곳만 아니라 서쪽에도 서십자각(西十字閣)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헐려 사라지고 지금은 동십자각만 덩그러니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동십자각을 찍은 사진을 보면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자경전의 것과 거의 똑같은 해치상이 보입니다.

해치가 만들어진 시기는 모두 고종 때입니다. 결국 자경전 앞 해치상 역시 고종 때 만들어진 걸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동십자각 입구를 지키던 해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십자각의 해치는 어딘가에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을 보면 당시에도 자경전 앞에 해치가 서 있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동십자각 해치와는 생김새와 자세가 조금 다르거든요. 혹시 서십자각이 헐리면서 그곳에 있던 해치가 자경전 앞으로 옮겨진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동십자각 해치도 어딘가에 보관돼 있는 것은 아닐까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향원정 복원은 현재 진행 중!

이런저런 궁금증도 품어보면서 궁궐을 돌아본다면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경복궁 답사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경복궁 후원을 대표하는 명소를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호수와 어우러진 향원정(香遠亭)이 아닐까요.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시절, 고종이 경복궁 후원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들어가 살던 1867년에 인공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보물 제1761호로 지정돼 있어요.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도 찾아온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호젓한 공간입니다.

연못 남쪽에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데요. 취향교(醉香橋)라는 이름도 근사한 이 다리는 사실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원래 위치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에요. 건청궁(乾淸宮)에서 머물던 왕의 동선에 맞게 지은 거지요. 6.25 전쟁 당시 폭격에 다리가 부서진 뒤 1953년에 다시 지었다는데, 그때 왜 원래 자리에 다리를 놓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전쟁 직후라도 분명히 다리가 부서진 잔해가 남아 있었을 거고, 그렇다면 제자리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요.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향원정 북쪽 건청궁 앞으로 다리가 놓여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요. 게다가 원래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나무다리를 얹어 놓았던 기단석이 그대로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처럼 다리 바닥면이 평평한 게 아니라 무지개다리처럼 가운데 부분이 위로 불룩하니 솟아 있었던 것도 알 수 있지요. 기왕 국가가 그토록 귀하게 여겨 보물로 지정했다면 경복궁 중건 사업의 취지에 맞춰 다리 또한 원래 자리에 제대로 복원하는 게 옳습니다. 1953년에 새로 지은 뒤로 지금까지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왜 저 모습으로 그냥 내버려 둔 걸까요. 지금 향원정에 가보면 연못 주변에 가림막이 빙 둘러 쳐져 있습니다. 낡은 향원정은 다 해체해서 말끔하게 보수하고, 취향교는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로 한 거지요.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요. 3년 뒤, 향원정이 어엿한 옛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